최두영 고려대 아프리카연구센터 부센터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 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아프리카 개발을 이야기할 때 오랫동안 반복돼 온 공식이 있다. 도로를 놓고 발전소를 짓고 철도를 연결하려면 정부 돈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세계은행이나 아프리카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AfDB), 선진국의 공적개발원조(ODA)에 기대야 했다. '아프리카 개발'이라는 말에는 자연스럽게 외부에서 들어오는 돈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이 익숙한 공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5년 잠정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ODA는 1천640억 달러(약 231조원)로 전년보다 실질 기준 23.1% 감소했다. OECD가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큰 연간 감소 폭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양자 ODA도 26.3% 줄었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주요 공여국들이 동시에 원조 예산을 줄이면서, 외부의 값싼 개발 자금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원조가 줄어드는 시점에 아프리카 각국의 사정도 넉넉하지 않다는 점이다.
높은 금리와 늘어난 국가부채 때문에 도로와 전력망, 디지털 인프라에 투자할 재정적 여유가 줄어 들었다. 얼핏 보면 아프리카는 앞으로 더 심각한 '돈 부족'에 시달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아프리카 내부에서 다소 역설적인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금융공사(Africa Finance Corporation·AFC)는 최근 아프리카 내부에 이미 약 4조달러(약 5천638조원)의 금융자산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아프리카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돈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돈 없는 대륙'이라는 오래된 통념
아프리카 금융공사가 집계한 4조달러(약 5천638조원)에는 상업은행과 연기금, 보험회사, 공공개발은행, 국부펀드, 중앙은행 등이 보유한 금융자산이 포함된다. 아프리카의 연금과 보험 자산만 1조달러(약 1천412조원)를 넘어섰고, 공공개발은행의 자산은 약 2천760억달러(약 389조원), 국부펀드는 약 1천640억달러(약 231조원)에 이른다.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 역시 5천억달러(약 705조원)를 넘어섰다. 이 숫자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동안 아프리카 개발 문제는 대부분 '국내에 돈이 부족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저축이 부족하니 외국인 투자와 원조를 받아야 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4조달러라는 숫자는 이 오래된 전제를 흔든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외부에서 들어온 자금보다 아프리카 내부 금융기관에 쌓인 돈이 더 크다면, 과연 아프리카를 단순히 '자본이 부족한 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느냐는 질문이 생긴다.
학계에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분석한 연구들은 외국 자본이 많이 유입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높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국내 금융시장이 그 자금을 생산적인 사업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효과가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의 양만이 아니다.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4조달러 가운데 5%만 인프라에 투자해도 2천억달러(약 282조원)다. 발전소와 도로, 철도를 상당히 많이 지을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 4조 달러는 금고에 잠자고 있는 돈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국민연금이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정부가 필요할 때 그 돈의 5%를 꺼내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돈에는 가입자라는 주인이 있고, 미래에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연기금과 보험회사도 마찬가지다. 보험사는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고, 은행은 예금자가 돈을 찾을 때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역시 경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환율과 대외 지급 능력을 지키기 위한 자금이지 발전소를 짓기 위한 여윳돈이 아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브라이트 시몬스(Bright Simons)가 아프리카의 '4조달러' 주장에 신중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돈의 상당 부분은 이미 국채와 기업 대출, 각종 금융상품에 투자돼 있다. 다시 말해 4조달러는 놀고 있는 현금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서 제 역할하고 있는 돈이다. 더 큰 문제는 인프라 투자의 특성이다. 발전소와 철도는 계획부터 완공까지 수년이 걸린다. 공사가 지연될 수도 있고, 정권이 바뀔 수도 있다. 환율이 급락하거나 예상했던 만큼 전기와 물류 수요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연기금 입장에서는 이런 위험을 모두 떠안으면서까지 투자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최근 아프리카 개발금융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은행 대출 적격성'(bankability)이다. 표현은 어렵지만 뜻은 간단하다. 좋은 아이디어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이 실제로 돈을 빌려주고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사업의 위험과 수익 구조가 잘 짜여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결국 질문은 달라진다. '아프리카에 돈이 있는가'가 아니라 '그 돈이 안심하고 들어갈 만한 사업이 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 돈을 움직이려면 먼저 '위험'을 움직여야 한다.
가령 5억달러(약 7천54억원)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를 짓는다고 해보자. 정부가 연기금에 "국가 발전을 위해 투자해 달라"고 요청하더라도 연기금은 쉽게 돈을 내놓기 어렵다. 발전소가 계획대로 완공될지, 생산한 전기를 제값에 팔 수 있을지, 환율이 급락하지 않을지 등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AfDB나 국제 보증기관이 일정한 손실이 발생할 경우 자신들이 먼저 부담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발전소 사업 자체는 똑같지만, 투자자가 부담해야 하는 위험은 크게 줄어든다. 돈이 바뀐 것이 아니라 위험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최근 아프리카 개발금융에서 보증과 신용 보강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신용 보강은 쉽게 말해 금융기관이 불안해하는 위험 일부를 공공기관이나 개발은행이 대신 떠안아주는 장치다. 그렇게 하면 그동안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연기금과 보험회사도 투자를 검토할 수 있다.
AfDB가 추진하는 '새로운 아프리카 개발금융 아키텍처(New African Financial Architecture for Development·NAFAD)' 역시 이런 방향에 서 있다. AfDB는 아프리카무역투자개발보험기구(African Trade and Investment Development Insurance·ATIDI)에 자본을 추가로 투입해 보증 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공기관이 모든 사업비를 대신 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부분을 공공기관이 먼저 부담해 더 큰 규모의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과거에는 공공자금 1달러로 1달러짜리 사업을 했다면, 앞으로는 공공자금 1달러가 민간의 5달러, 10달러를 움직이는 구조가 중요해진다.
◇ 잠비아에서는 '빚'이 전력망 투자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일부 국가에서 실험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잠비아다. 잠비아는 2020년 코로나19 이후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이후 수년 동안 국제 채권단과 채무조정을 진행했지만, 단순히 빚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경제를 다시 성장시키기 어려웠다. 특히 잠비아에서는 만성적인 전력 부족이 산업 활동의 큰 걸림돌이었다. 2026년 잠비아 정부는 AfDB의 금융지원과 자국 자금을 활용해 약 13억6천500만달러(약 1조9천243억원) 규모의 채권을 조기에 다시 사들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기까지라면 일반적인 채무조정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잠비아는 채무조정으로 앞으로 줄어들게 될 원리금 부담 가운데 최대 2억7천500만달러(약 3천876억원)를 향후 15년 동안 전력망 현대화에 다시 투자하기로 했다. 빚을 줄여 생긴 재정적 여유를 다시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는 전력 인프라에 집어넣는 구조다. 과거의 채무조정이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에 집중했다면, 새로운 방식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빚을 줄여 생긴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까지 설계한다. 개발금융이 단순히 돈을 빌리는 기술에서 국가의 부채와 미래 투자를 함께 설계하는 기술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 ODA의 종말이 아니라 '역할의 변화'
그렇다면 이제 아프리카는 ODA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원조가 줄어들수록 남아 있는 공공자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과거에는 ODA 1달러가 직접 학교를 짓거나 도로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앞으로는 그 돈이 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고, 민간기업이 가장 꺼리는 초기 위험을 대신 부담하거나, 환율 위험을 줄여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연기금과 보험회사에서 더 큰 규모의 자금을 끌어낼 수 있다면 같은 원조 자금으로 훨씬 많은 투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아프리카연합 개발청-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신파트너십(African Union Development Agency-New Partnership for Africa's Development·AUDA-NEPAD)이 2025년 앙골라 루안다에서 개최한 인프라 금융 정상회의에서도 이런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핵심은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발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은행과 연기금, 투자기관이 돈을 넣을 수 있을 만큼 사업의 구조를 갖추는 것이었다.
결국 'ODA 이후의 아프리카'는 원조가 완전히 사라지고 아프리카가 혼자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시대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 공공자금이 개발사업의 비용을 직접 지급하던 방식에서, 공공기관이 위험을 먼저 흡수하고 이를 통해 국내외 민간 자본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아프리카에 4조달러가 있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돈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돈에는 모두 주인과 목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몇 %를 억지로 끌어다 쓸 수 있는지가 아니다. 연기금과 보험회사, 은행이 스스로 투자하고 싶어 할 만큼 믿을 수 있는 사업을 얼마나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아프리카 개발금융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돈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돈을 움직이게 할 제도가 있는가.' ODA 이후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족한 자원은 어쩌면 돈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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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두영 박사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프리카연구센터 부센터장,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겸임교수, 국제개발협력학회 아프리카위원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경제학 박사. 주에티오피아 대사관 전문직 행정원 역임, '아프리카 비즈니스 환경과 시장 진출 전략', '동아프리카 스타트업 시장분석' 등 아프리카 경제 및 디지털 전환에 관한 다수 논문과 보고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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