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와 보복 공격을 주고받으며 중동 내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이란에 대한 공습으로 시작된 중동 분쟁이 사우디와 예멘을 포함한 아라비아반도 전역으로 번져나가는 양상이다.
특히, 후티 반군이 지난 11일(이하 현지시간) 예멘의 홍해 연안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육상 송유관 마저 이란 측 공습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으면서 중동 원유 수송로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이란과 이라크, 걸프 6개국이 호르무즈 해협 내 새로운 해상 항로 개설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4일 개최할 예정이었던 역내 외무장관급 회의 마저 개막 직전 무산되면서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편,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게 파병 압박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로부터 후티 반군을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미군이 호르무즈 해협 방어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티 반군까지 상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후티, '눈물의 문' 모카 장악…홍해 수송로 '비상'
사우디 빈 살만 "후티 공습해달라"…트럼프 "거절"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이 홍해의 관문인 바브엘만데브 해협 일대를 전격 장악하며 글로벌 해상 물류 수송로를 위협하고 나섰다. 이란의 대리 세력으로 꼽히는 후티가 호르무즈 해협에 이어 홍해 길목까지 완전히 통제할 경우, 향후 대미 관계 및 중동 정세에서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P, AFP,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후티 반군은 전략 거점인 모카 항구를 장악한 지 하루 만인 11일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핵심 요충지인 페림섬(마윤섬)을 점령했다.
페림섬은 바브엘만데브 해협 한가운데 위치해 물길을 나누는 지리적 요충지다. 예멘 정부 소식통은 정부군이 페림섬에서 철수한 직후 무장한 후티 전투원들이 보트를 타고 섬에 들어섰으며, 해안선을 따라 군용 차량과 대원들이 배치되었다고 전했다.
후티는 해협 내 남아있던 그레이터·레서 하니시섬과 예멘 본토의 두바브 지역까지 모두 손에 넣으며 예멘 쪽 홍해 연안 전체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예멘군 관계자는 "서부 해안 지역의 정부 관할 영토가 사실상 모두 함락됐다"고 인정했다.
후티의 이번 공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상당한 타격이 될 전망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하루 평균 930만 배럴(2023년 기준)의 원유가 지나는 길목으로,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12%를 차지한다. 사우디는 그동안 이란과의 갈등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홍해 수송로에 의존해왔다.
실제로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사우디의 8월 원유 공급량은 하루 평균 600만 배럴로 전월 대비 230만 배럴 급감하며 30여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두 차례 직접 전화해 후티에 대한 공습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는 미국이 직접적인 공습 대신 정보 및 타격 목표 자료만 제공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절은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이 미 함정에 공격을 가하는 등 확전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홍해 교전에 휘말리는 것은 중동 상황을 악화시키고 이란의 의도에 빠지는 것이라고 우려한 결과로 분석된다.
한 미국 당국자는 미국의 우선순위가 홍해의 항행 자유를 유지하는 데 있다며, 더 넓은 지역 분쟁은 역내 동맹국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호르무즈-홍해 봉쇄·송유관 피격…사우디 '3중 봉쇄'에 세계 경제 비상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수송망이 연쇄 타격을 입으며 글로벌 '에너지 대란'의 우려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우회하던 대체 수송로마저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장악과 육상 송유관 피격으로 사실상 마비되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하는 등 시장의 불안감이 급증하고 있다.
11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전날 사우디 리야드와 메디나 지역을 겨냥한 드론 공격으로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지르는 핵심 '동서 파이프라인(약 1,200km)'의 가동이 전격 중단됐다. 사우디는 그동안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대응해 홍해 연안 얀부항으로 이어지는 이 송유관을 통해 하루 약 500만 배럴(전 세계 공급량의 4~5%)의 원유를 우회 수송해왔다.
이번 공격에 사용된 드론은 이라크 남부 마이산주에서 발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라크 정부는 친이란 시아파 세력의 근거지인 해당 지역의 군 지휘관을 해임하고 이란 접경 국경 검문소를 폐쇄했으나, 사우디의 원유 수송 차질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해양정보업체 케플러에 따르면 사우디의 지난달 원유 수출량은 하루 320만 배럴로 전쟁 전(하루 700만 배럴)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13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육상 송유관마저 멈춰서면서 사우디의 원유 수출 여력은 고사 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후티 반군이 홍해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핵심 거점인 모카 항구와 페림섬(마윤섬)을 전격 장악하면서 사우디는 동쪽(호르무즈)과 서쪽(홍해) 원유 수송로가 모두 가로막히는 '쌍둥이 봉쇄'에 갇히게 됐다.
예멘 정부군-사우디, 후티에 반격…사상자 급증
호르무즈 충돌 지속…이란 상선 피격에 사망자 발생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이 홍해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 일대를 장악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예멘 정부군이 거점 탈환을 위한 전면 반격에 나섰다. 후티 반군 역시 사우디 본토 군사기지 공격으로 맞대응하면서, 이란 전쟁의 여파가 주변국 간의 직접 충돌로 확산하고 있다.
예멘 관영 사바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예멘 정부군은 12일 홍해 관문인 모카 항구 인근에서 후티 반군의 차량과 무기 체계를 파괴하고 조직원 다수를 사살했다.
예멘 정부군은 X(옛 트위터)를 통해 예멘 공군이 타이즈 지역 내 후티 반군의 거점과 병영을 세 차례 집중 공습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후티 측은 "최근 48시간 동안 사우디 측 항공기가 후티 통제 지역에 129차례에 달하는 공습을 퍼부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군과 사우디의 공세에 후티도 사우디 본토를 직접 타격하며 맞불을 놨다. 사우디 당국은 국경 인근 자잔 지역에 후티의 발사체가 떨어져 민간인 2명이 다치고 모스크와 차량 등이 파손됐다고 밝혔다.
이어 야히아 사리 후티 군 대변인은 13일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해 사우디 남부 샤루라의 군사기지 내 무기 저장소와 지휘 통제소를 타격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예멘 내전이 격화되면서 인도적 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는 성명을 통해 7월 이후 발생한 피란민이 7만 6천 명에 달하며, 이 중 7만 명 이상이 9월 들어 집중 발생했다고 밝혔다. IOM은 "이번 주 피란민 수가 지난주 전체의 4배에 달한다"며 "밤을 지새우며 가족 단위로 도망치는 이들이 안전하게 머물 곳이 전혀 없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주요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무력 충돌도 지속되고 있다.
13일 로이터 통신과 이란 국영 언론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호르무즈 해협의 게슘섬 인근을 지나던 이란 상선 한 척이 피격당했다. 이번 공격으로 선원 1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비슷한 시각 영국 해군 해사무역기구(UKMTO) 역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선박 한 척이 발사체에 피격됐다고 밝혔다.
다만 UKMTO가 언급한 선박과 피격된 이란 상선이 동일한 선박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공격 주체와 피해 규모도 파악 중이다. 그동안 이란과 공방을 벌여온 미군은 이번 사건에 대해 별도의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걸프국 호르무즈 협상 '파행'…바레인 불참·반발에 막판 연기
이런 가운데 이란과 이라크, 걸프 6개국이 호르무즈 해협 내 새로운 해상 항로 개설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4일 개최할 예정이었던 역내 외무장관급 회의 마저 개막 직전 무산됐다. 이란과의 외교 관계 복원 전에는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겠다는 바레인의 전격 불참 선언과 일부 걸프 국가의 보완 요구가 결정적 파행 원인으로 작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드르 알부사이디 오만 외무장관은 13일 밤 11시께 X(옛 트위터)를 통해 "합의(consensus) 도출과 건설적인 대화 여건 조성을 위해 내일 살랄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역내 회의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알부사이디 장관은 "역내 안정과 지속 가능한 협력을 뒷받침할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것"이라면서도 재개최 일정은 명시하지 않았다.
이란 국영 파르스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란 외무부 당국자 역시 "일부 역내 국가들의 요청에 따라 이란과 오만 양국 정부가 협의를 거쳐 회의 연기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는 이란과 오만이 추진해 온 '호르무즈 해협 새 해상 항로 지정'과 통가 운항 절차 개편안을 걸프 협력회의(GCC) 회원국에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회의 직전까지 "주요 의제는 호르무즈 해협의 새 항로 개설"이라며 회의 개최를 자신해 왔다.
그러나 바레인이 "이란의 걸프 기반 시설 공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외교 관계가 복원되기 전까지는 이란이 참석하는 어떠한 회의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반발하며 불참을 선언했다. 여기에 예멘 후티 반군의 공세로 원유 우회 수송망에 직격탄을 맞은 사우디아라비아마저 이안-오만 주도 협정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참석 여부를 불확실하게 하면서 막판 구도가 급격히 흔들렸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상선에 통항 허가 및 운항 수수료 부과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오만과의 합의 체결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미국과 걸프 국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이 국제 공해이자 자유 항행 구역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며 이란의 일방적 관할권 행사를 거부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역내 다자 외교 회의가 무산됨에 따라, 최근 예멘 후티 반군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장악과 맞물려 중동 내 해상 수송로를 둘러싼 군사·외교적 대립은 당분간 한층 더 격화될 전망이다.
트럼프 "전쟁 중간선거 직후 끝날 것…이란, 합의 원해 전화 쇄도"
중동 긴장이 이전보다 격화되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이 오는 11월 미 중간선거 직후 또는 그 이전에 마무리될 것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아일랜드를 방문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카운티 클레어의 둔베그 골프 리조트에서 취재진과 만나 "이란이 절실하게 협상을 원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란은 합의를 원하고 있고, 올바른 조건의 합의를 해야 한다"면서 "쓸모없는 합의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후 구상과 관련해서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란에서) 철수할 것"이라면서도 "베네수엘라의 사례처럼 우리가 체류하며 석유를 확보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그렇다"고 말해 전황 및 대치 상황에 따른 석유 자원 통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란과 걸프 지역 국가들이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4일 오만에서 회동하는 것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상관없다. 그들의 결정에 달린 문제"라며 거리를 뒀다.
[폴리뉴스 김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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