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권수빈 기자]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로 시선을 붙잡는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선명한 색은 동물과 사람, 풍경의 형태를 넘어 장면 전체의 분위기를 만든다. 원화 가까이 다가가면 종이를 잘라 덧붙이고 채색한 흔적과 두껍게 올라온 물감, 그 위에 다시 그려진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인쇄물에서는 보이지 않던 수정과 보완의 흔적이다.
영국 3대 그림책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1930~2016)의 원화전이 오는 10월 1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1950년대 초기 작업부터 말년 작품까지 60여 년에 걸친 창작 여정을 원화와 드로잉, 아카이브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62년 출간된 ‘ABC’는 와일드스미스의 명성을 알린 중요한 출발점이다. 알파벳을 익히는 그림책이지만 글자에 대응하는 이미지는 학습을 위한 시각 자료에 머물지 않는다. 동물과 사물이 강렬한 색으로 표현되고, 화면의 구성과 물감의 흔적이 글과 나란히 장면을 만들어낸다. 와일드스미스는 이 책으로 1962년 케이트 그리너웨이 메달을 받았다. 현재 ‘CILIP 케이트 그리너웨이 메달’로 불리는 이 상은 어린이책 분야의 뛰어난 일러스트레이션을 평가하는 상이다. 그림책에서 그림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넓혔음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와일드스미스는 ‘사자와 생쥐’, ‘바람과 해님’, ‘토끼와 거북이’ 등 여러 작품에서 색과 형태를 더욱 자유롭게 다뤘다. 익숙한 이야기를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기존 그림책의 문법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서 동물은 실제 모습에 가까우면서도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과 모습으로 등장한다. 색채는 대상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역할을 넘어 각 장면의 분위기와 감정을 만들어낸다.
원화를 직접 보면 이러한 특징이 더욱 선명해진다. 강렬한 색이 화면 전체를 꽉 채우고, 만화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작품에 따라서는 컬러 사인펜으로 그린 듯한 선명한 인상도 준다. 색과 형태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익숙한 동물이나 사물이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놓인다. 그렇다고 기괴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환상적인 장면이 이어지지만 공포나 불안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쪽에 가깝다. 밝은 색채 사이에는 때때로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림책 작가’라는 명칭만으로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책에 실린 그림이라는 출발점은 분명하지만 색채와 재료, 화면 구성은 그저 회화로 다가온다. 와일드스미스가 스스로를 ‘화가’라고 생각했다는 점도 작품을 보고 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그림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인 동시에 색과 형태, 화면을 통해 독립적인 이미지를 구성한 회화이기도 하다. 어린이책이라는 형식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이름 하나로만 묶기에는 표현의 폭이 좁다.
당시 컬러 인쇄기술의 발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시장에서는 1978년 인터뷰 영상과 함께 실제 출판된 그림책을 살펴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와일드스미스는 당시 컬러 인쇄기술의 발전을 언급한다. 인쇄 과정에서 이미지의 크기나 색이 달라지면 세밀하게 그려 놓은 부분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책의 크기에 맞춰 그림을 그렸다는 작업 방식은 원화를 책으로 옮기는 과정까지 염두에 두고 작업했음을 보여준다.
원화에서 확인되는 오려 붙이기와 덧칠의 흔적도 이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화면에 남은 수정의 흔적은 완성된 이미지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색채와 세부 묘사를 중요하게 여긴 작가에게 원화를 실제 인쇄물로 구현하는 과정은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단계였을 것이다.
그림책의 이미지를 다른 매체로 확장한 작업도 확인할 수 있다. ‘노아 박사의 우주선’은 미디어아트로 재구성돼 화면 속에서 움직인다. 음악과 함께 이동하는 동물들을 바라보면 원화에서 보았던 색과 형태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환경 문제를 다룬 작품인 만큼 메시지는 가볍지 않지만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색채와 움직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음악과 영상이 더해지면서 원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다른 감각으로 경험하게 한다.
와일드스미스의 활동 영역은 출판에만 머물지 않았다. 패션과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도 그의 이미지가 활용됐다. 리버티 패브릭은 그의 작품 속 이미지를 디자인에 활용했고, 일부는 나이키 한정판 운동화에도 사용됐다. 그림책에서 출발한 이미지가 책장을 넘어 패브릭과 패션 상품으로 이어진 사례다.
국내 관람객이라면 삼성전자와 함께한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와일드스미스는 2013년 삼성전자의 ‘물 절약’ 캠페인을 위해 작업했고, 여러 그림책에 등장했던 이미지를 조합해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책 표지와 영상 등 다양한 매체에 활용됐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공식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관심은 다시 회화와 미술사에 가까워진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와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을 여행하며 조토와 두초, 프라 안젤리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과거의 거장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부활절 이야기’, ‘성 프란치스코’, ‘요셉 이야기’, ‘모세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 ‘성모 마리아 이야기’ 등 후기 작품에서는 초기 그림책에서 보여준 강렬한 색채에 더해 보다 구조적인 화면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림책이었던 만큼 작업에는 어린이를 향한 시선도 분명하게 자리한다. 그는 그림을 본 아이들이 어떤 해석이나 답을 내놓더라도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해진 답을 전달하기보다 그림을 통해 각자의 상상과 생각을 펼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림책 원화전이기에 전시장에는 어린이를 동반한 보호자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작품 앞에 오래 머물러 보면 이 전시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림책’이라는 전제를 잠시 내려놓았을 때 작품의 또 다른 면이 보인다. 색의 조합과 물감의 질감,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 원화에 남은 수정의 흔적까지 살펴보면 각각의 그림은 그저 회화 작품으로 읽힌다.
어린 시절 책으로 만났다면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는 그림이겠지만 원화로 다시 만났을 때는 다른 경험이 가능하다. 색채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분위기는 인쇄된 이미지와는 다른 밀도로 다가온다. 어린이와 함께 보기 좋은 전시이면서도 그림책이라는 지칭에서 벗어나 작품 자체를 바라보려는 성인 관람객에게도 충분히 흥미롭다.
뉴스컬처 권수빈 ppbn0101@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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