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미디어뉴스] 김상진 기자 = 수소 H, 헬륨 He, 리튬 Li. 아이들이 주기율표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원소의 신비가 아니라 낯선 기호와 숫자다. 이름도 생소한 원소에 알파벳 기호와 원자번호까지 붙어 있으니 화학을 배우기도 전에 암기부터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과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기보다 외워야 할 것이 많은 과목으로 인식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주기율표는 애초에 118개의 원소를 무작정 외우라고 만든 목록이 아니다. 비슷한 성질을 가진 원소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해 원소들 사이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체계에 가깝다. 각각의 원소를 따로 떼어 암기하는 것보다 왜 특정 원소가 그 자리에 놓였는지, 주변 원소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를 갖는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주기율표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2026년 5월 출간된 아게도리도리의 『원소 원정대』는 바로 이 어려운 첫 만남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118개 원소에 저마다의 특징을 살린 캐릭터를 부여하고, 각 원소의 성질과 관계를 게임 공략집을 읽듯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국내판은 화학자 장홍제 교수가 감수했다. 단순한 캐릭터 도감이라기보다 화학이라는 낯선 세계에 들어가는 진입로를 바꿔놓은 책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습의 순서다. 일반적인 과학 공부는 개념과 정의를 먼저 익힌 뒤 흥미가 따라오기를 기대한다. 원자의 구조를 배우고, 원소 기호를 외우고, 주기율표의 규칙을 이해하는 과정이 먼저다. 문제는 아이가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이미 어렵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원소 원정대』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캐릭터와 이미지로 먼저 관심을 끌고, 그 모습이 왜 그렇게 표현됐는지를 따라가다 실제 원소의 특성으로 들어가게 한다. 공부를 먼저 시키고 재미를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라 호기심을 먼저 만든 뒤 지식이 따라오도록 설계한 셈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사람은 의미 없이 흩어진 정보보다 서로 연결된 이야기를 더 쉽게 기억한다. 역사에서도 왕의 이름과 연도를 줄줄이 외우는 것보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할 때 기억이 오래간다. 원소 역시 H, He, Li라는 기호만으로 만나면 각각 독립된 암기 대상이지만, 서로 다른 성격과 관계를 가진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주기율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관계도로 바뀐다.
아이의 과학 공부에서 중요한 것도 이 지점이다. 과학을 못하는 것과 과학을 재미없게 배운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이미 과학을 어려운 과목이라고 인식한 아이에게 문제집 한 권을 더 주는 것이 반드시 답이 되지는 않는다. 개념을 더 반복하기 전에 과학에 대한 첫인상부터 바꿔줄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부모가 『원소 원정대』를 활용하는 방법도 기존 학습서와는 달라야 한다. 책을 읽힌 뒤 몇 개의 원소를 외웠는지 확인하거나 바로 문제를 내는 방식은 이 책의 장점을 오히려 줄일 수 있다. 캐릭터 도감처럼 자유롭게 펼쳐보게 하고 어떤 원소가 가장 재미있는지, 왜 그 캐릭터가 마음에 드는지 정도를 물어보는 편이 낫다. 아이가 하나의 원소에 관심을 보이면 그때 실제 성질이나 사용처를 함께 찾아보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다.
공부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정답을 맞혔을 때만 생기지 않는다. 왜 그런지 궁금해진 순간에도 학습은 시작된다. 정답 하나는 한 문제에서 끝나지만 질문 하나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과학 자체가 세상의 현상을 보고 왜 그런지 묻는 데서 출발해온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에게 필요한 능력도 단순 암기보다 호기심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원소는 교과서 밖의 세상과 연결하기에도 좋은 소재다. 마시는 물에는 수소와 산소가 있고, 연필심에는 탄소가 들어 있다. 자동차와 건물에는 철과 알루미늄이 사용되고 휴대전화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에는 훨씬 다양한 원소가 필요하다. 주기율표 속 낯선 이름 몇 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화학이 실제 생활과 산업 속으로 연결된다.
경제와 산업 뉴스에서도 원소는 자주 등장한다. 전기차 산업에서 리튬 가격이 왜 중요한지, 희토류 공급망을 둘러싸고 국가 간 경쟁이 왜 벌어지는지, 반도체 제조에서 특정 소재 확보가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출발점 역시 결국 물질과 원소에 대한 기초 지식이다. 한 권의 어린이 과학책이 곧바로 산업 공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 속 개념이 현실의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주는 데는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초등 고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라면 이런 경험의 의미가 더 크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학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으로 세분화되고 개념도 본격적으로 어려워진다. 이때 자신은 원래 과학을 못한다는 인식이 굳어지면 새로운 단원을 만날 때마다 부담부터 느끼기 쉽다. 반대로 이전에 과학에서 재미를 경험한 아이는 모르는 개념을 만나도 처음부터 벽을 세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행학습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흔히 선행이라고 하면 다음 학년 교과 내용을 미리 배우고 문제를 풀어보는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을 ‘낯설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역시 하나의 선행이 될 수 있다. 아이가 원소의 정확한 정의를 외우지 않았더라도 캐릭터를 통해 한번 접해봤다면, 학교 수업에서 같은 이름을 만났을 때 받아들이는 부담은 분명 달라진다.
부모의 역할 역시 정답을 대신 설명하는 데 머물 필요가 없다. 아이가 리튬에 관심을 보인다면 왜 전기차 배터리에 리튬이 많이 쓰이는지 함께 찾아볼 수 있고, 철을 좋아한다면 왜 철에 녹이 스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탄소를 계기로 다이아몬드와 흑연이 어떻게 같은 원소에서 전혀 다른 물질이 되는지를 살펴볼 수도 있다.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한 관심이 다른 과학 영역으로 이어지면 독서와 학습의 경계도 자연스럽게 흐려진다.
『원소 원정대』의 가장 큰 장점은 118개의 원소를 얼마나 많이 외우게 하느냐에 있지 않다. 과학에도 성격과 관계,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이미 알고 있던 세계를 넓혀주는 책이 될 수 있고, 과학을 어렵게 느끼는 아이에게는 교과서와 다른 입구를 제공한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부모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성적과 학습량으로 향한다. 부족한 과목을 찾아 문제집을 추가하고 공부 시간을 늘리는 방식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아이가 한 과목을 오래 공부하게 만드는 힘은 문제를 얼마나 많이 풀었느냐보다 그 과목에 대한 첫 경험이 어땠느냐에서 생기기도 한다.
『원소 원정대』를 읽고 118개의 원소 가운데 단 하나만 기억해도 괜찮다. 어느 날 학교 수업에서 그 이름을 다시 만났을 때 아이가 낯선 표정을 짓는 대신 이미 아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워한다면 책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이다.
잘 외우는 아이와 오래 궁금해하는 아이 가운데 누가 과학을 더 멀리 가져갈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과학은 답을 기억하는 데서 끝나는 학문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소 원정대』는 주기율표를 쉽게 외우게 하는 책이라기보다, 아이가 원소 하나를 통해 세상에 첫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책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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