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산문집 '언어의 온도'로 170만 부 판매를 기록한 이기주 작가가 자신의 책을 사재기해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작가가 과거 인연이 있던 출판사 대표에게 돈을 주고 전국 서점을 돌며 자신의 책 1600여 권을 사들이게 한 혐의를 받는다고 MBC가 9일 보도했다.
의정부지검 고양지청 형사3부(부장검사 정혜승)는 이날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위반 혐의로 이 작가와 출판사 대표를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이 파악한 사재기 규모는 1631권으로 집계됐다. MBC에 따르면 이는 범행 기간 전체 판매량의 14% 수준이다.
이기주 작가 / 연합뉴스
문제가 된 책은 2024년 1월 출간된 산문집 '보편의 단어'다. 170만 부 밀리언셀러 '언어의 온도'의 후속작으로 출간 당시 독자 관심이 높았다. 그해 상반기 교보문고에서 12번째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 검찰 조사 결과 이 순위 뒤에는 사재기가 있었다.
검찰은 이 작가가 2024년 3월부터 7월까지 한 출판사 대표와 공모해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한 것으로 봤다. 이 작가가 책을 살 돈을 건네면 출판사 대표가 전국 교보문고 매장을 돌며 책을 반복적으로 나눠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이 출판사 대표는 과거 이 작가의 책을 펴내며 인연을 맺은 사이다. 다만 순위 조작 대상이 된 신간을 발행한 출판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곳에서만 사재기하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이들은 전국 지점을 순회했다. 같은 매장에서는 직원이 교대하는 시점을 노려 다시 책을 샀다. 포장을 훼손해 파본을 사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교보문고 회원이 같은 날 같은 책을 여러 권 사면 판매량이 1권으로 집계된다는 점을 노려 비회원으로 구매하는 빈틈도 파고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해당 책의 교보문고 분야별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는 기존 3~4위권에서 2~3위권으로 올랐다.
이기주 작가의 책 '언어의 온도'
수사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유통심의위원회의 고발로 시작됐다. MBC는 사재기에 공모한 출판사 대표가 심의위원회에 자진 신고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고 전했다. 검찰은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뒤 보완 수사를 통해 자금 전달 경위와 구체적인 구매 수법을 밝혀냈다. 검찰은 두 사람이 광고비를 쓰는 것보다 베스트셀러 순위를 끌어올리는 편이 홍보 효과가 크다고 보고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MBC에 비정상적 사재기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이 광고보다 효과적인 홍보라는 잘못된 인식을 부를 수 있는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 작가는 기소 사실이 알려진 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을 모두 내렸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도 삭제했다. MBC 취재진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이 작가는 응하지 않았다.
정가 기준 '언어의 온도'의 전체 매출은 약 235억원이다. 이 작가가 발행인을 맡은 1인 출판사에서 펴낸 만큼 일반적인 작가 인세 10%보다 훨씬 많은 수익이 이 작가에게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할인, 출판비 등을 고려하더라도 실제 이익이 최소 수십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파장은 온라인 서점으로 번졌다. YES24와 알라딘에서 이 작가의 책들이 품절·절판 처리됐다. 두 곳 모두 중고도서 매입을 받지 않고 있다. 전자책으로만 살 수 있는 상태다. 교보문고는 '언어의 온도'를 절판 처리했다.
이 작가는 자기 책을 순위 조작 없이 베스트셀러에 올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중앙일보는 2017년 12월 '언어의 온도'로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의 저자가 된 이 작가를 인터뷰했다. 이 작가는 약 8년간 기자로 일한 뒤 2010년 전업 작가가 된 인물이다. '언어의 온도'를 펴낸 출판사 '말글터'의 발행인도 이 작가 본인이다. 이 때문에 1인 출판의 대표 주자로 꼽혔다. 인터뷰 당시 '언어의 온도'는 73만 부, '말의 품격'은 32만 부가량 팔린 상태였다.
이 작가는 당시 책이 많이 팔린 비결로 전국 서점을 직접 도는 '순례'를 꼽았다. 그는 "책을 내고서 6개월 동안 교보·영풍·반디앤루니스의 전국 매장을 다 찾아갔다. 독립 서점까지 합하면 200곳이 훨씬 넘는다. 출판사 영업사원도 잘 안 가는 지역의 작은 책방까지 가봤다. 순례였다. 나는 그렇게 부른다. 캐리어를 끌고 다녔는데 참 무거웠다. 작가로서의 책임감·근심·절박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 보니 천천히 책이 움직이는 흐름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언어의 온도'는 이 작가가 낸 일곱 번째 책이었다. 그는 앞서 낸 책들이 거듭 실패했다고 털어놨다. 이 작가는 "『언어의 온도』는 나의 7번째 책이다. 에세이도 냈고, 자기계발서도 냈지만 다 실패했었다. ‘언어의 온도’도 실패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당시 출판계에서는 '이기주 미스터리'라는 말이 나올 만큼 판매 비결을 두고 의문이 일었다. 한 대형서점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사재기를 의심해 조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베스트셀러 사재기는 출판계의 고질적 병폐로 꼽혀 왔다. 저자나 출판사가 판매량을 인위적으로 부풀려 순위를 끌어올리면, 독자는 실제 인기와 다른 정보를 근거로 책을 고르게 된다. 현행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제23조는 출판사나 저자가 판매량을 올릴 목적으로 자기 간행물을 부당하게 사들이거나, 관련된 사람에게 부당하게 사들이도록 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적발이 쉽지 않다는 점은 오래 지적돼 온 문제다. 출판사 내부에서 고발자가 나오지 않으면 직접 적발이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온라인 서점에선 주문 이력 추적이 가능해 사재기가 쉽지 않지만 이번 사례처럼 오프라인 매장을 직접 도는 수법은 서점이 일일이 걸러내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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