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NPB) 통산 최다 안타(3085개) 기록자인 그는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을 하며 '독설가'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 2024년 귀화한 그는 9일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6세. 한국 언론과 마지막 인터뷰에서 나눈 얘기를 남긴다.
장훈은 프로 입단 이후에도 여러 번 귀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다가 84세 나이에 귀화했다. 일본에선 온전한 일본인이 아니었고, 한국에선 한 번도 한국인인 적이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장훈은 일본에서 성공했다. 그가 한국을 느끼고 경험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한국에 대한 장훈의 마음은 효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삼남매를 홀로 키운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바로 그것이다. 어머니의 저고리를 잊지 않는 게 아들의 애국심이었다.
장훈이 1981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은 이듬해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그는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를 맡았다.
“이용일 사무총장, 이호헌 사무차장과 열심히 뛰었습니다. 조국에 프로야구를 만드는 게 너무 좋았어요. 1982년 전국을 다니면서 느낀 게 그때 느낀 한국은 대단했습니다. 정말 역동적이고 밝았어요.”
장훈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다. 1990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2007년에는 한국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국과 일본 야구에 공히 기여한 덕분이다. 경계인의 운명을 그는 그렇게 개척했다.
이후에도 장훈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한·일 야구를 위해 애썼다. 2012년에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한‧일 프로야구 레전드 매치(은퇴선수 친선경기)’에 일본 대표팀 단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5년 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아울러 경색됐던 한일 관계가 풀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한류로 인해 한국인을 보는 세상의 시각이 달라졌어요. 경제적으로도 한국이 세계적인 나라가 됐습니다. 얼마나 멋진 세상에서 얼마나 풍요롭게 삽니까? 한국과 일본은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일수록 더 그래야 해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싸우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은 그걸 모릅니다. 그건 한국, 일본 다 마찬가지예요.”
인터뷰 내내 장훈은 정치적 수사를 쓰지 않았다. 그래도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는 화합과 평화를 당부했다. 장훈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끝>
◆장훈(張本勳, 1940년 6월 19일~2026년 9월 9일)
NPB 통산 최다 안타(3085개) 기록자.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최고의 스타가 됐지만,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1959년 NPB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해 신인왕을 차지했고,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O-H 타선’을 구축했다. 1981년 은퇴할 때까지 NPB 통산 출전 3위(2752경기, 통산 타율 3위(0.319) 통산 타점 4위(1676개), 통산 홈런 7위(504개)를 기록한 뒤 1990년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앞서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를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1980년)을 수훈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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