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알라처럼 되고 싶어"…자국에 테니스 열풍 일으킨 '필리핀의 김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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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알라처럼 되고 싶어"…자국에 테니스 열풍 일으킨 '필리핀의 김연아'

이데일리 2026-09-08 07:00: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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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스타in 주미희 기자] 잘게 부순 조개껍데기로 만든 마닐라의 테니스 코트. 진지한 표정의 4살짜리 아이가 힘껏 포핸드를 날린다. 공은 코트 밖으로 벗어났지만 아이의 꿈은 분명하다. 필리핀 테니스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알렉산드리 이알라(21)처럼 되는 것이다.

WTA 워싱턴 오픈 우승 당시 기뻐하는 알렉산드라 이알라.(사진=AFPBBNews)
WTA 워싱턴 오픈 우승 당시 기뻐하는 알렉산드라 이알라.(사진=AFPBBNews)


2005년생 이알라의 급부상과 함께 필리핀에 전에 없던 테니스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농구와 복싱, 닭싸움의 인기가 압도적인 필리핀에서 테니스는 오랫동안 일부 엘리트층의 스포츠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계 무대에서 이알라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풍경이 달라졌다.

한 명의 스포츠 스타가 비인기 종목의 지형을 바꾼다는 점에서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김연아가 한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메달을 따내고 세계 정상에 서면서 수많은 어린이에게 피겨스케이팅의 꿈을 심어줬듯, 필리핀에서는 이알라를 보며 라켓을 잡는 아이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AFP통신은 최근 이알라의 활약 이후 필리핀에서 테니스 라켓 판매가 급증하고 코트 예약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테니스 인기가 치솟았다고 전했다. 취학 전 어린 자녀를 테니스장으로 데려오는 부모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토네트 멘도사 필리핀테니스협회 사무총장은 “이알라는 단순히 사람들이 테니스를 보게 한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테니스를 하게 만들었다”며 “아마 부모들은 ‘우리도 이렇게 하면 우리 아이가 다음 이알라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윔블던 테니스대회에서 이알라가 공을 받아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장면은 9살 마유미 스티븐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닐라의 알라방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함께 훈련을 기다리던 스티븐스는 “사진을 보면서 ‘와, 저게 미래의 내 모습일 거야’라고 생각했다”며 “커서 이알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른바 ‘이알라 효과’는 스포츠용품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스포츠용품 업체 테카트론도 필리핀에서 지난 1년간 입문자용 테니스 라켓 판매랴이 66% 급증하자 매장 진열과 소셜미디어 콘텐츠를 이알라 열풍에 맞춰 재편했다. 회사 관계자는 “우리도 이 흐름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US오픈에서의 이알라.(사진=AFPBBNews)
US오픈에서의 이알라.(사진=AFPBBNews)


이알라는 필리핀 테니스가 이전까지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개척하고 있다. US오픈 주니어 여자 단식 챔피언 출신인 그는 2025년 프랑스오픈에서 생애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성인 무대 본선에 출전한 뒤 불과 1년여 만에 여자프로테니스(WTA) 세계랭킹 20위 내로 올라섰다.

지난 7월에는 윔블던 16강에 진출했고, 지난달 워싱턴오픈에서는 전 세계랭킹 1위 오사카 나오미(일본)와 현재 세계 3위 제시카 페굴라(미국)를 연달아 꺾으며 생애 첫 WT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필리핀 선수 최초의 WTA 투어 단식 우승이었다. 현재 열리고 있는 US오픈에서도 16강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까지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알라는 13세 때 가족과 고국을 떠나 장학금을 받고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 테니스 아카데미로 향했다. 어린 시절 해외로 건너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쟁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점 역시 김연아가 어린 시절부터 열악한 국내 피겨 환경을 딛고 세계 무대로 올라선 과정과 맞닿아 있다.

국민적인 응원 열기도 뜨겁다. AFP에 따르면 해외에서 생활하는 필리핀인은 약 1000만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알라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백 달러짜리 윔블던 대회 좌석도 마다하지 않는다. 조용한 관전이 익숙한 테니스 경기장에서 농구장을 방불케 하는 응원까지 펼쳐진다.

멘도사 사무총장은 올해 초 호주오픈 당시를 떠올리며 “사람들이 농구 경기에서처럼 소리를 질렀다. 일부는 평생 테니스 경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었다”며 “이 정도까지 올라간 필리핀 선수는 이알라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연아의 등장 이후 한국에서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과 유소년 참여가 크게 늘었던 것처럼 필리핀에서도 이알라의 성공이 테니스 저변을 넓히는 촉매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알라를 응원하는 필리핀 팬들.(사진=AFPBBNews)
이알라를 응원하는 필리핀 팬들.(사진=AFPBBNews)


다만 뜨거워진 인기와 달리 필리핀의 테니스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필리핀테니스협회에 따르면 인구 1억 1600만 명의 필리핀에 있는 테니스 코트는 100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공공 코트는 찾기 어렵고 제대로 된 라켓 하나가 많은 필리핀인의 한 달치 임금에 맞먹을 정도로 경제적 진입 장벽도 높다.

필리핀에 있는 코트 가운데 상당수는 ‘셸 코트’(shell court)다. 잘게 부순 조개껍데기와 모래, 점토를 섞어 만드는 필리핀 특유의 코트로, 붉은 클레이 코트보다 건설·유지 비용이 적게 든다. 이같은 ‘셸 코트’를 예약하는 것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어렵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선수층도 얇다. 이알라를 제외하면 세계 테니스 정상권에서 필리핀 선수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랭킹에 이름을 올린 필리핀 남자 선수는 4명에 불과하고 세계 1000위 이내 선수는 한 명도 없다. 여자 선수 중에서는 이알라가 유일하게 세계랭킹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알라가 일으킨 변화는 이제 인프라 확충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 지방정부들은 다목적 체육 시설 등을 활용해 하드코트 건설에 나서고 있다. 데카트론에도 테니스 코트를 만들거나 강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는 지역사회의 후원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필리핀테니스협회도 올해 마닐라 북쪽에 정부 지원을 받는 국립테니스센터 건립에도 착수할 예정이다. 테니스 아카데미와 8000명석 규모 경기장을 갖춘 시설이다.

아직 이알라의 뒤를 이을 선수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멘도사 사무총장은 테니스를 시작하는 어린이가 늘어날수록 ‘제2의 이알라’가 나올 가능성도 커질 것으로 기대했다.

마닐라의 작은 코트에서 “이알라처럼 되고 싶다”며 라켓을 휘두르는 아이들이 변화의 시작이다. 한국에서 김연아 한 명이 피겨스케이팅을 낯선 종목에서 국민적인 관심을 받는 스포츠로 끌어올렸듯, 필리핀에서는 이알라가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2의 이알라'를 꿈꾸며 테니스를 배우는 어린이들.(사진=AFPBBNews)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2의 이알라'를 꿈꾸며 테니스를 배우는 어린이들.(사진=AFPBB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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