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은행이나 증권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은 직장인들이 많을 것입니다. 전화를 받은 김 대리는 당황스럽습니다. 투자는 잘 모르겠고, 뭔가는 골라야 한다고 독촉하니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제일 안전한 게 뭐예요?” “네, 원금 보장되는 예금형 상품이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해주세요.”
이것이 한국형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현주소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디폴트(Default)’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값’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가입자에게 “당신의 디폴트 옵션을 직접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기본값’을 ‘선택’하라니, 이는 제도의 본질적인 취지와 맞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2006년 미국, 엔론이 남긴 교훈
앞 장에서 본 것처럼, 401(k)는 기업의 책임을 개인 계좌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넘겼다고 해서 개인이 곧바로 현명한 투자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미국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401(k) 가입자들에게 “상품을 고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겁을 먹고 가장 안전해 보이는 단기자금이나 예금으로 도망쳤습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2001년 벌어진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의 파산이었습니다. 회사가 방치한 상태에서 수많은 직원이 퇴직연금 자산을 자사주에 집중 투자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파산하자 노후 자금까지 함께 사라졌습니다. 스터드베이커 사건의 401(k) 재현이었던 셈입니다. “개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이다”라는 뼈아픈 교훈이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이 교착 상태를 깬 것이 2006년 제정된 연금보호법(PPA, Pension Protection Act)입니다. 이 법은 자동가입의 확산을 도왔지만, 이 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단계입니다. 가입자가 아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 그 돈을 어디에 둘 것인가. 미국은 이 질문에 적격 자동 투자 상품, 즉 QDIA로 답했습니다.
구조는 단순했습니다. 근로자가 아무런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기업이 미리 선정한 적격 투자상품으로 돈이 들어갑니다. 그 적격 상품은 TDF 같은 생애주기형 펀드, 밸런스드펀드, 전문관리계좌처럼 장기 은퇴자산 운용에 맞는 상품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이 절차를 지켜 이런 상품을 신중하게 선정·감시했다면, 투자 결과가 나쁘더라도 일정한 면책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면책권이 책임 면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은 아무 상품이나 골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노동부의 QDIA 규정은 미선택 가입자의 돈이 장기 은퇴저축에 맞는 분산투자 상품으로 가도록 설계되었고, 기업에게도 QDIA를 신중하게 선정하고 계속 감시할 책임을 남겨두었습니다. 이것이 앞 장에서 말한 “무기”의 정체입니다. 선택하지 못하는 개인을 대신해 시스템이 첫 운전대를 잡되, 그 운전대를 잡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몰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원리금보장상품은 노후 빈곤이라는 병을 고칠 수 없는 설탕물에 가깝습니다. 달콤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30년짜리 은퇴자산을 키우는 치료 효과는 약합니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 기본값의 중심을 원리금보장상품이 아니라 생애주기형 투자상품에 두었습니다. ‘선택의 고통’을 없애주자, 미국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구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디폴트 옵션 — “제발 좀 선택해 주세요”
한국은 어떤가요? 우리는 2022년 제도를 도입하면서 미국식 기본값의 철학을 온전히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법은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한 방법으로 운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전에 정한 방법을 결국 가입자 본인이 먼저 골라야 합니다. 디폴트 옵션의 본질은 “당신이 선택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약속인데, 한국은 그 앞에 다시 하나의 선택 절차를 세워두었습니다.
이것은 제도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결정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빈틈의 종착지입니다. 이 선택마저 하지 않고 완전히 방치된 적립금은 원리금보장 상품도 아닌, 이자조차 제대로 붙지 않는 유동성 자산(현금성 자산)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선택을 줄이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선택 절차를 하나 더 만들고, 그 절차마저 통과하지 못한 돈은 가장 나쁜 곳에 남겨두는 셈입니다.
그 결과, 선택을 강요받은 공포에 질린 개인들은 여전히 익숙한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도피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도피에는 제도적 압박이 하나 더 존재합니다 — 가입자의 투자 성향을 판단하는 적격성심사(Suitability Assessment)입니다. 한국의 적격성심사는 중·단기 투자를 전제로 설계돼 있어서, 30년을 내다봐야 할 연금 자금조차 중·단기 투자 안정성 위주로 유도됩니다. 개인의 공포뿐 아니라 제도의 설계 자체가 안전으로 떠미는 이중 압박인 셈입니다.
미국이 장기 기본값을 생애주기형 투자상품 중심으로 설계한 것과 달리, 한국은 원리금보장상품까지 디폴트 옵션의 핵심 선택지로 넣어둔 것입니다. 이는 총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민간인에게 “수백 가지의 무기를 보여주며 알아서 골라 살아남으세요”라고 방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훈련받지 않은 민간인은 두려움에 떨며 가장 안전해 보이는 방패만 들고 전장에 나가는 꼴입니다.
선택지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보호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그리고 투자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좋은 제도는 개인에게 “공부해서 현명한 선택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성공 비결은 근로자의 금융 지식을 높인 것이 아니라, ‘선택할 필요’를 없애버린 것에 있습니다. “투자는 전문가에게 맡길 테니, 당신은 본업에 충실하세요.” 이것이 PPA가 미국 근로자에게 선물한 진정한 복지입니다.
한국형 디폴트 옵션이 성공하려면, 지금처럼 근로자에게 전화를 걸어 “골라달라”고 애원하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일정 기간 근로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진 적격 투자 상품에 자동으로 투자되는 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품을 고르는 기업과 금융회사에는 명확한 선정·감시 책임을 부여하되, 절차를 제대로 지킨 경우에는 합리적인 수준의 면책권을 주어야 합니다. 또한 수익률을 갉아먹는 원리금보장 상품은 적격 투자 상품 리스트에서 제외하거나 후순위로 미뤄야 합니다. 선택지를 없애고 전문가가 운전대를 잡게 하는 것, 그것이 훗날의 노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이 짊어진 리스크(DC형 제도)’와 ‘고장 난 무기(한국형 디폴트옵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안한 개인들이 노후 자금을 이직할 때마다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가져가려면 어떤 그릇이 필요할까요? 다음 장에서는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흩어진 퇴직금을 담아둘 개인 금고인 IRP가 한국에서 어떻게 ‘잠시 거쳐 가는 환승 통로’로 전락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평생 자산 관리의 허브로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