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버튼을 누르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 설거지를 시작한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치우고, 책상 위에 널브러진 물건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화장실까지 청소하고 나면 처음 돌려놓은 빨래가 어느새 끝나있다.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벌써 피로감이 몰려온다. 어차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집안일은 이상하리만큼 미루고 싶다. 오늘 하지 않는다고 당장 큰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결국 접시 몇 개를 더 쌓고 빨래 한 무더기를 외면한 채 '내일 해야지'라고 다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가상의 공간에 들어가 스스로 정리정돈을 자처한다. 어질러진 마트에 떨어진 상품을 하나씩 주워 선반에 진열하고, 도서관 바닥에 흩어진 책 수천 권을 분류해 책장에 꽂는다. 이삿짐 상자를 열어 물건 하나하나 제자리에 정리를 시작한다.
현실에서는 노동인 청소와 정리가 게임에서는 왜 쾌감이 될까.
아무 생각 없이, 하나씩 제자리로
세계는 안 구해도 선반은 채운다
지난 6월 출시된 인디게임
마트는 금방 대지진이라도 난 듯 모든 물건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과일부터 잡지, 냉동식품, 와인, 라면까지 16개 구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집고 맞는 진열대를 찾아 놓는다. 적을 쓰러뜨릴 필요도 세계를 구할 필요도 없다. 해야 할 것은 사실상 '진열'뿐이다.
평가는 '매우 긍정적'. 되려 4668개는 부족하다며 만 단위에 물건 업데이트를 원한다. 게임 설명부터 '힐링 정리 시뮬레이터'를 내세운다.
직접 플레이 해보니 흥행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 7시간을 플레이해 보고 떠올린 키워드는 △단순함 △몰입감 △성취감 △쾌감이었다.
처음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마주했을 때는 막막했다. '이걸 언제 다 치우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일단 그나마 구분하기 쉬운 책들을 집어 들었다. 종류를 확인하고 하나씩 책장에 꽂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 한 시간이 흘렀다. 별생각 없이 물건을 진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바닥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코너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묘한 성취감이 든다. 발걸음을 빨리 옮겨 다른 진열대도 빠르게 채워 넣는 데 집중한다.
마지막 물건 하나를 제자리에 올려놓았을 때는 오히려 아쉬움이 남았다. 더 큰 공간에서 더 많은 물건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진열만 반복했을 뿐인데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근심과 고민도 적어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은 사라져 있었다.
책부터 병, 이삿짐까지, 치울 건 넘쳐난다
키보드랑 마우스만 있으면 정리 준비 끝
이 같은 감각은
지난 4월 출시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21년 출시된
정리와 청소가 게임이 된 역사는 이보다 더 길다.
일반적인 액션게임이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삼는 전투가 이 게임에서는 이미 끝난 뒤다. 대신 다른 게임이라면 화면 밖으로 지워버렸을 '뒤처리'를 플레이어에게 맡긴다.
게임의 소재만 보면 이상한 흐름이다. 현실에서는 돈을 내서라도 누군가 대신해 줬으면 하는 일을 게임 안에서는 오히려 돈을 내고 직접 한다. 왜일까?
현실 청소는 무한루프, 게임 청소는 클리어
현실은 또 쌓이고, 게임은 하나씩 줄어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이는 '끝'이다. 현실의 집안일에는 사실상 엔딩이 없다. 오늘 설거지를 끝내도 다음 끼니를 먹으면 그릇은 다시 쌓인다. 빨래를 돌려도 하루만 지나면 세탁바구니에는 다시 빨랫거리가 들어간다.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도 머리카락과 먼지는 어느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게임 속 과업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정리게임에서는 공간 자체가 일종의 '진행률 표시줄'이 된다. 잡지 한 권을 집어 책장에 꽂으면 빈칸 하나가 채워진다. 코너 하나를 모두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불과 몇십 분 전과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놓인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결과를 게임이 몇 초 단위로 끊임없이 돌려주는 셈이다.
또 다른 차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정해져 있다는 데 있다. 집안일은 매 동작마다 판단이 끼어든다.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 남긴다면 어디에 둘지, 화장실 청소를 먼저 할지 빨래부터 돌릴지 결정해야 한다. 정리하다 발견한 오래된 물건에 잠시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청소를 시작했을 뿐인데 작은 결정이 끝없이 따라붙는다.
현실에서 정리가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하는 노동'이라면 게임 속 정리는 '이미 존재하는 정답을 찾아가는 퍼즐'로 바뀐다. 같은 물건 정리지만 머리가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리'라는 게임 장르는 현실의 청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 따라붙는 수많은 판단을 걷어낸 뒤 집고, 옮기고, 제자리에 놓는 가장 단순한 행동만 남겼다.
직접 플레이하며 가장 크게 체감한 것도 반복에서 오는 몰입감이었다. 처음에는 4668개라는 숫자가 부담스러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은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마우스로 물건을 집고 진열대를 찾고 다시 다음 물건으로 이동하는 행동이 일정한 리듬을 만들기 시작했다.
익숙해질수록 자신만의 요령도 생긴다. 가까운 물건부터 처리할지, 한 종류를 몰아서 끝낼지, 특정 구역부터 비워낼지 스스로 규칙을 만들게 된다. 단순한 반복 속에서도 나름의 방식이 생기면서 몰입은 오히려 깊어진다.
사람들이 이 게임에서 소비하는 것은 '청소 노동'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청소에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만 잘라낸 경험에 가깝다. 엉망으로 흐트러졌던 공간이 정돈되고 비어 있던 선반이 일정한 배열로 채워지고 무질서했던 물건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만큼 피로도 따라온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를 비워둔 채 눈앞에 놓인 하나의 행동만 집중해서 반복하고 싶은 순간도 있다.
현실의 방을 정리할 힘은 없지만 이상하게 무언가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싶은 날, 혹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 비워두고 한 가지 행동에만 몰입하고 싶은 날이 있다면 한 번쯤
☞ 릴렉싱 게임(Relaxing Game) = 경쟁이나 빠른 판단보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편안한 플레이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을 뜻한다. 정리·청소 게임에서는 물건을 집어 제자리에 놓는 행동을 반복하며 복잡한 판단에서 벗어나 한 가지 작업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 젠 게임(Zen Game) = 높은 난도나 승패보다 차분한 반복과 정돈, 탐색 과정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과 만족감을 강조하는 게임을 가리킨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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