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코리아=이영준 기자]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되찾을 수 없는 일상의 파편들뿐이었다.
지난 8월 17일 새벽, 거제시 일대를 집어삼킨 기습적인 물폭탄이 지나간 지 어느덧 3주가 흘렀다. 초기의 급박했던 응급 복구가 일단락되고 시와 면 단위의 대규모 수해 지원 인력과 장비가 대부분 철수한 시점. 하지만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산비탈 소외 주택가에는 남은 절망을 걷어내기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묵묵한 땀방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일 찾은 거제시의 한 산비탈 수해 피해 주택. 기습 폭우가 발생한 지 20여 일이 지났지만, 가파른 언덕을 따라 흘러내려 마당 가득 허벅지 높이까지 차오른 붉은 토사는 수마(水魔)가 남긴 깊은 상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이번 폭우 당시 산 위에서 엄청난 양의 토사와 함께 거대한 바위들이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와 집 옆 부분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주택의 한쪽 옆면은 형체도 없이 붕괴됐고 깨진 벽면 사이로 흙더미와 가재도구가 뒤엉키면서 집 내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찌적거리는 진흙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때렸고, 주민의 삶의 터전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됐다.
수해를 입은 오순이(64·여·거제면) 씨는 흙탕물과 무너진 벽체 잔해로 아수라장이 된 안방 구석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쓰지 못하게 된 가전들과 가구들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오 씨는 “당시 무섭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새벽 1시까지 잠도 자지 못했다”며 “새벽 2시쯤에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비를 맞으며 집 밖으로 겨우 뛰쳐나왔다”고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이어 오 씨는 “산비탈에 있는 집인데도 마당 가득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다. 고지대인데 물이 이만큼 찼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정도”라며 “몸만 겨우 빠져나오고 나자마자 산 위에서 집어삼킬 듯 굴러 떨어진 거대한 바위들이 집 옆면을 그대로 덮쳤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 끝을 흐리며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이처럼 망연자실한 수해 주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나선 것은 대규모 지원 철수 이후에도 현장에 남아 장기 복구에 팔을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신천지자원봉사단을 비롯한 민간 봉사 단체들과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은 행정 지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해 복구 지원단을 유지하며 매일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봉사자들은 거제면 일대 산비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수해 복구의 손길이 시급한 여러 가옥과 주택, 마을회관 등으로 흩어져 일제히 복구 작업에 돌입했다. 굴착기 등 중장비가 진입하기 어려운 좁고 가파른 산비탈 골목과 아수라장이 된 내부 공간에서는 오롯이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각 현장으로 흩어진 봉사자들은 삽을 들고 단단하게 굳어있는 토사를 연신 퍼 날랐고,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가구와 부서진 장판을 계단 아래로 끌어냈다.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쏟아졌고 등 뒤는 순식간에 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됐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었다.
골목 한편에서는 침수된 옷가지와 그릇, 가재도구들을 깨끗한 물로 씻어내는 작업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한 장의 수건이라도 더 살려내려는 듯 진흙을 묵묵히 닦아내는 손길에는 수해를 입은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하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번 복구 작업에 참여한 신천지자원봉사단 권도연(22·여·서울 관악구) 씨는 “봉사활동 참여는 이번이 처음인데 거제에 삼촌이 살고 계셔서 걱정되는 마음에 수해 봉사까지 신청해 내려오게 됐다”고 참가 계기를 전했다.
권 씨는 이어 “뉴스에서 접했을 때는 복구가 거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여전히 사람 손길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며 “직접 눈으로 본 피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서 이번 활동이 끝나더라도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한 번 더 복구를 도우러 올 생각”이라고 다짐을 밝혔다.
이들의 진심 어린 땀방울에 주민들도 조금씩 기운을 차리는 모양새다. 가재도구 세척을 지켜보던 또 다른 수해 주민 이연실(76·여·연초면)씨는 “지원이 철수되면서 이제 정말 혼자 남겨졌다는 막막함에 눈물만 났는데 자기 일처럼 끝까지 발 벗고 나서는 이들을 보니 비로소 살 길을 찾은 것 같다”며 봉사자들의 손을 꼭 잡았다.
수해 현장은 여전히 치워야 할 흙더미와 가옥 수리 등 산적한 과제가 남아있어 완전한 복구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현장을 가득 채운 따뜻한 동행의 손길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