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속이 쓰린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 우리 입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메뉴가 튀어나온다.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맑은 국물, 그 위로 수북하게 쌓인 노란 머리의 채소와 송송 썬 대파, 그리고 매콤한 고춧가루 한 숟갈. 바로 쓰린 속을 달래주는 콩나물국밥이다.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으로 듬뿍 떠서 입안으로 넘기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끈함과 함께 속이 확 풀린다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콩나물은 굳이 국밥집을 가지 않더라도 집 밥상에 하루가 멀다고 오르는 가장 만만한 반찬이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소금과 다진 마늘, 고소한 참기름을 훌쩍 둘러 조물조물 무쳐놓으면 밥 한 공기는 쉽게 비운다. 동네 마트나 시장에 가면 단돈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커다란 검은 봉지를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가격도 저렴하다. 한국에서는 공기처럼 흔하고 당연한 이 채소가,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대접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 세계를 통틀어 콩나물을 이렇게 매일같이 밥상에 올리고 산더미처럼 먹어 치우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빵과 고기를 주로 먹는 서양은 그렇다 치더라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조차 마트 매대에서 콩나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해외 사람들은 입에 대지도 않고 뱉어내는 이 흔한 채소를, 왜 우리는 식탁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먹고 있는 걸까.
덜 익으면 비리고 씹으면 턱 아프다… 외국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
해외여행을 가서 따뜻한 쌀국수를 먹거나 볶음면을 시켰을 때, 그릇 한쪽에 콩나물 비슷하게 생긴 채소가 듬뿍 쌓여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씹어보면 이건 콩나물이 아니라 녹두로 싹을 틔운 숙주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콩나물 대신 이 부드러운 숙주를 요리에 쓴다. 숙주는 노란 대가리 부분이 아주 작고 줄기가 수분으로 가득 차 연하다. 끓는 육수에 살짝만 담갔다 빼거나 아예 생으로 씹어 먹어도 풋풋하고 먹을 만하다.
반면 메주콩을 불려 키워낸 콩나물은 타국 사람들의 입맛에 영 맞지 않는 까다로운 식재료다. 생콩나물의 굵고 둥근 노란 대가리를 씹어보면 돌덩이처럼 딱딱한 데다, 코를 찌르는 날것의 콩 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이 특유의 비릿한 냄새는 향신료나 허브 향에 익숙한 외국인들의 코에 유독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다.
게다가 야들야들한 숙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콩나물의 두꺼운 줄기는 고무줄처럼 질기게만 느껴진다. 푹 익히지 않으면 콩 냄새가 진동을 하고, 날것으로 먹기엔 질겨서 턱이 아픈 채소. 외국 식당의 요리사들 입장에서는 다루기도 번거롭고 맛도 낯선 이 싹을 굳이 요리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타국에서 콩나물은 싹이 터버려 팔 수 없게 된 불량 콩이거나, 가축 사료로나 쓰이며 사람들의 식탁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뚜껑 덮고 기다려야"… 비린내 잡고 뼛속까지 시원한 국물 우려낸 손맛
우리는 이 억세고 냄새나는 콩나물을 밥상 위로 기어코 끌어올렸다. 그 바탕에는 집집마다 부엌에서 수없이 잔소리로 이어져 내려온 요령이 숨어있다. 집에서 콩나물을 삶을 때 어머니들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뚜껑을 열고 삶든지, 아니면 다 익을 때까지 절대 뚜껑을 열지 마라." 끓는 도중에 냄비 속이 궁금하다고 뚜껑을 덜컥 열어 찬 공기가 훅 들어가면, 비릿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져 국물 전체를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뜨거운 불 위에서 푹 익고 나면 콩나물은 완전히 다른 맛을 낸다. 돌덩이 같던 노란 대가리는 밤을 삶은 것처럼 고소해지고, 질기다던 줄기는 오독오독하고 기분 좋게 씹히는 맛을 낸다. 하이라이트는 콩나물 꼬리에 잔뜩 들어있는 아스파라긴산이다. 펄펄 끓는 물에 이 성분이 우러나오면서 속을 편안하게 달래주고 술기운을 밀어내는 특유의 시원한 국물이 만들어진다. 외국인들은 맡기조차 싫어했던 그 비린내 나는 식재료가 우리 식탁에서는 그 어떤 숙취 해소 음료보다 훌륭한 국밥 재료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 겨울철이 되면 밭에 푸른 채소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때 옛사람들은 어두운 방구석에 시루를 엎어놓고 수시로 물을 주며 콩나물을 길러 먹었다. 원래 콩에는 비타민C가 전혀 없지만, 물을 머금고 싹을 틔워 콩나물이 되는 과정에서 비타민이 듬뿍 생긴다. 햇빛 한 줌 안 드는 방에서 물만 먹고 자라나, 찬 바람 부는 혹독한 겨울을 버티는 사람들에게 요긴한 반찬이 되어준 셈이다.
뜨거운 해물찜 못지 않아… 펄펄 끓는 양념과 찰떡궁합
콩나물의 냄새 잡는 법과 다루는 요령을 터득한 한국인들은 콩나물을 맑은 국에만 넣지 않고 식탁 위 거의 모든 요리에 곁들이기 시작했다. 콩나물이 가진 진짜 매력은 펄펄 끓는 매운 양념 속이나 뜨거운 불판 위에서도 푹 퍼지지 않고 꼿꼿하게 제 모양과 아삭함을 유지한다는 데 있다.
식당에서 맵고 걸쭉한 아귀찜이나 해물찜을 시켜보면 안다. 이 뜨겁고 붉은 양념 사이에 연한 숙주를 듬뿍 넣는다고 상상해보자. 뜨거운 열기와 끈적한 녹말을 버티지 못하고 금세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요리 전체가 질척한 죽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반면 콩나물은 그 엄청난 열기를 꿋꿋하게 버티며 두꺼운 줄기 속으로 맵고 짠 양념을 쏙쏙 빨아들인다. 식당에서 해물찜을 먹을 때 메인 재료인 오징어나 아귀 고기보다, 양념을 흠뻑 머금은 이 콩나물 더미를 건져 먹느라 바쁜 것도 다 이런 이유다.
삼겹살을 구울 때도 콩나물은 단단히 한 몫을 한다. 고기기름이 줄줄 흐르는 불판 아랫목에 고춧가루와 식초를 넣어 새콤매콤하게 무친 빨간 콩나물무침을 듬뿍 얹어 구워보자. 돼지기름에 구워진 콩나물은 고기의 느끼함을 단숨에 씻어주면서 씹는 맛까지 더해주어 고기를 질리지 않고 계속 들어가게 만든다. 단돈 천 원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뻔한 채소지만, 찌개든 볶음이든 어떤 요리에 들어가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콩나물. 억세고 비린 냄새 너머에 숨겨진 기분 좋은 아삭함과 고소함을 찾아낸 덕분에 오늘도 우리의 밥상은 든든하고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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