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 칼럼] 이야기 소묘⑰ 요즘 작업: 질서를 붙잡는 마음과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Ⅱ에 이어
[문화매거진=이응 작가] 이번에는 ‘강박과 히스테리’라는 심리적 구도를 하나의 큰 틀로 놓고, 그 안에서 실제 작가들은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왔는지 개별작가와 작품을 예로 살펴볼 것이다. 이는 단편적으로 그들의 작업 안에서 질서와 통제, 규칙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하나의 시대나 미술사조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한 작가의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거대한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개인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거나 벗어나려는 태도가 작품의 형식과 제작 방식 안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구체적인 장면들을 몇 명의 작가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내가 선별한 작가는 세잔, 칸딘스키, 몬드리안이라는 세 인물이며 이들의 작업을 차례로 통과해 보겠다.
먼저 세잔이다. 세잔은 눈앞에 보이는 자연을 단순히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하는 구조를 찾아내려 했다. 자연의 복잡한 모습을 기본적인 형태와 관계로 환원하려 했던 그의 태도는 변화하는 세계를 보다 안정적인 질서로 붙잡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데,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규칙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칸딘스키에 이르면 그 질서화의 대상이 자연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간다. 그는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색과 선, 점과 면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감정과 정신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감정 역시 무질서한 상태로 남겨두지 않았다. 각각의 조형 요소가 어떤 힘과 관계를 갖는지 연구하면서 내면의 세계를 하나의 시각적 질서로 조직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영역마저 일정한 원리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몬드리안에 이르면 이러한 질서화의 욕망은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아간다. 자연의 구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과 표현의 흔적까지 점차 제거하고 수평과 수직, 제한된 색채와 기하학적인 면만을 남긴다. 복잡한 세계를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관계로 환원하면서, 개인의 우연이나 취향마저 넘어서는 순수한 질서를 찾으려 한 것이다.
세 사람을 하나의 흐름으로 놓고 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세잔이 자연에서 질서를 발견하려 했다면, 칸딘스키는 인간의 내면에서 질서를 찾았고, 몬드리안은 결국 자연과 개인의 감정 모두를 제거한 뒤 질서 그 자체를 만들려고 했다.
자연의 질서에서 정신의 질서로, 그리고 마침내 순수한 질서로 나아간 셈이다.
다시 기하학
세잔에게 기하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의 흔들리는 지각을 붙잡는 골격에 가까워 보인다. 세잔이 사과나 산, 인물을 그릴 때 흥미로운 것은 자연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단순하게 바꾸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눈앞의 대상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보는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형태가 달라지고, 빛이 바뀌면 색이 달라지고, 시선이 움직이면 공간의 관계도 흔들린다. 세잔은 그 변화 속에서 계속해서 “무언가가 유지되는 것”을 찾고 싶었던 듯 하다. 그래서 원통, 구, 원뿔 같은 기본적인 형태가 중요해지는데 이것들은 현실의 사과나 산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표면 아래에서 형태를 지탱하는 구조이자 복잡한 도상을 단순한 원리로 환원해주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계속 변하지만, 기하학은 변하지 않는다.
세잔이 “세계가 어떻게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칸딘스키는 조금 더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도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칸딘스키에게 점, 선, 면,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각각이 일종의 힘을 가지고 있는 도상이였다. 점은 정지와 집중의 느낌을 만들고, 선은 방향과 운동을 만들고, 색은 서로 다른 정신적 울림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칸딘스키의 기하학은 세잔의 기하학보다 훨씬 심리적으로 보인다. 추상미술이라고 하면 흔히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칸딘스키의 작업은 오히려 감정을 조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때 기하학은 외부 세계의 형태를 설명하는 언어에서 내면의 힘을 표기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몬드리안에서는 자연의 개별적인 모습을 넘어 관계 자체를 회화의 주제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몬드리안이 무엇을 제거하려고 했는가의 문제이다. 그는 우리가 모두 다 아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대상을 제거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표현과 감정적 붓질까지 최소화하여 수직, 수평, 비율, 면, 색, 관계만 남겼다. 몬드리안에 이르면 기하학은 현실을 설명하지 않고 기하학 자체가 현실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세잔에게 기하학은 사물 뒤에 있는 구조였고, 칸딘스키에게 기하학은 감정 뒤에 있는 구조였으며, 몬드리안에게 기하학은 세계를 이루는 관계 그 자체가 된다.
이들 작업은 추상미술이 발전해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안에서 강박증적인 질서화의 움직임을 함께 읽어보고 싶다.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분해하고 정리하고 규칙을 부여함으로써 통제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기하학은 단순히 삼각형이나 사각형을 사용하는 미술 양식을 넘어 더 근본적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형태와 관계로 분해하고, 그 사이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사고방식의 구조와 강박증적 구조 사이의 유사성을 연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강박증의 역설이 드러난다. 이렇게 강한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질서의 반대편에 있는 무질서와 우연,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질서를 향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질서로는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선명해진다.
그리고 어쩌면 역사는 매번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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