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미디어 박효영 기자] 이번 박위의 낙상 사고와 그로 인한 논란을 두고 스레드 엘라이 계정에는 아래와 같은 평론이 올라왔다.
박위가 연신 사과까지 한 공익을 박제해서 자기 유튜브에 올린 건 분명한 잘못이다. 근데 박위를 욕하고 갑자기 <만능발>이 좋다고 치켜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기득권층인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에게 요구하는 태도가 너무 투명하게 보인다. 웃어라. 우리 보기 좋게. 우린 장애인 교통을 위한 이동권을 챙겨줄 생각이 전혀 없지만 불편하게 토달지 말고 질질 짜지도 말아라. 한국에서 장애인의 위치는 일개 짐승만도 못하다. 여러분들은 대체 장애인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이 장애인에게 바라는 것들을 요약해보면 항상 웃으며 비장애인 앞에 빌빌거려라. 정부가 장애인 복지를 챙겨주든, 안 챙겨주든 그저 늘 감사하고 그 은혜 앞에 고개를 숙여라. 장애인이 가진 유전자는 정상성에서 벗어난 열등한 유전자이니 감히 결혼과 출산을 하지 말지어다. 불편을 호소할 때는 최대한 공손해야 한다, 물론 들어주긴커녕 신경도 안 쓸테지만. 넌 몸이 불편해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기준으로 사회에 폐를 끼쳐선 안되며 그냥 찍소리 말고 공기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라.
엘라이는 박위 사태에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그냥 장애를 입은 만만한 약자 주제에 설치고 다니는 게 꼴같잖아서 업신여기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고 역설했다.
당신은 그저 비장애인으로 태어났을 뿐이고, 장애인은 그저 장애를 입었을 뿐이다. 당신이 장애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보다 우월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마치 본인이 윗계급인 것 마냥 꺼드럭거리지 좀 말아달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박위의 모습. <사진=박위 인스타그램>
유튜브 채널 <위라클>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박위의 KTX 낙상 사고 여파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대전역에서 하차하던 중 사회복무요원의 실수로 휠체어가 넘어진 사고 그 자체보다, 이후 해당 CCTV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며 불거진 ‘사적 제재’ 논란이 채널 구독자 수 급감과 대중적 포화로 이어진 탓이다. 대중의 분노는 명확하다. 현장에서 즉시 정중한 사과를 한 보조 인력(사회복무요원)을 향해 100만 구독자의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가 ‘영상 박제’라는 과도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박위가 성숙하지 못한 대처를 한 것이 맞다.
박위를 옹호하는 입장을 가진 일각에선, 영상 내용을 봤을 때 해당 사회복무요원에 대한 비난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휠체어 장애인의 KTX 낙상 사고를 예방하고자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공익적인 영상에 불과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인 혐오의 코멘트들을 쏟아내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크리에이터로서 자신의 발언과 컨텐츠가 대중에게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파급을 일으킬지 판단하는 ‘메타인지와 정무적 사고’가 부재했다. 자신이 처했던 위험과 분노를 공공의 시스템 개선이라는 정책적 의제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개인의 감정적 격앙과 저격성 연출을 앞세움으로써 스스로 문제제기의 진정성을 흐렸다. 100만 유튜버라는 권력과 제복을 입은 취약한 청년간의 프레임을 자초한 셈이다. 장애 인식 개선에 힘써온 박위의 행보로 봤을 때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반감만 거세졌으니 역효과가 아닐 수 없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을 역임했던 변재원 작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아래와 같이 설파했다.
나는 구독자 100만을 가진 인플루언서가 왜 CCTV 영상을 자신의 유튜브에 올리며 분석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분명히 정식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제도에 대한 지적 대신 개인의 공격에 더 치중했다. 그는 해당 기관에 공문을 보내고, 입장을 표명하는 ‘오래된 운동권적 사유’가 수백만명이 관람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유튜브에 신상을 박제하는 처형의 문법보다 훨씬 안전하고 문제 해결 지향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박위 개인의 대처 능력 부족을 비판하는 걸 넘어, 이 사태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 아래 깔린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깊은 ‘시혜적 관점’이다. 사태 이후 온라인을 도배한 반응들을 살펴보면 “도와주려다 실수한 건데 담그려고 하다니”, “베풀어준 호의를 특권으로 안다”는 비난이었다. 장애인의 헌법적 기본권으로서 ‘이동권과 안전’ 문제를 선심 쓰듯 베푸는 온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전히 상당수 한국인들은 장애인을 동등한 주권자로 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에게 KTX 승하차 과정에서의 낙상은 신체 구조상 뼈가 쉽게 부러지거나 평생 침상에 누워 지내야 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생존의 위협이다. 어쩌다가 “가끔 있는 일”이라는 현장 KTX 직원의 말을 듣고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백화점 직원이 비장애인 고객에게 “에스컬에이터에서 1년에 한 두 번쯤 굴러떨어져서 중상을 입는 일이 가끔씩 발생한다”고 말하면 어떤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간이 경사로가 뜨니까 어쩔 수 없이 직원이나 요원이 발로 밟아야 한다면 밟고 있다가 휠체어 장애인이 내려올 때 걸리지 않도록 바로 떼도록 철저히 숙지시키든지, 아니면 발판이 붕 뜨지 않도록 설비를 개선해야 한다. 아래 사진과 같이 경사로 옆면에 손잡이만 있으면 숙여서 손으로 잡아 뜨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가 있다.
경사로 옆면에 있는 손잡이를 직원이 잡고 누르고 있는 모습. <사진=스레드 'akpma2005'>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재로서의 고속 열차를 타는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안전하게 이용할 권리’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KTX 승하차 리프트의 구조적 결함이나 보조 인력에 대한 체계적 안전 교육 미비라는 ‘시스템 문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동정받아야 할 장애인이 도와주는 사회복무요원에게 감사할줄 모르고 욕먹이려고 한다”는 인신공격만이 남았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탈 없는 장애인’의 이미지만 장애인의 전형으로 상정해왔다. 즉 비장애인들의 일상에 불편을 주지 않고, 호의에 납작 엎드려 감사해하며, 불행한 삶을 ‘인간 승리’로 포장해서 전달하는 무해하고 순종적인 타자만을 ‘좋은 장애인’으로 승인해왔다. 권리를 요구하고 화를 내는 ‘불편한 장애인’이 나타나는 순간, 언제든지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고 손가락질로 응수하는 시혜적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중들은 이참에 잘 걸려든 박위의 과거 이력들을 무차별적으로 건져 올려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술 마시고 노상방뇨를 하다가 장애인이 된 사람이 장애인의 지위를 권력화 한다고 비난하고, 걸그룹 출신 가수 송지은씨와의 결혼식에서 동생이 대변 뒤처리를 해줄 형수님을 만나서 너무 좋다고 축사를 했던 대목을 재소환해서 ‘조리돌림’을 하고 있으며, 고액 강연료에 대한 성토까지 이어졌다. 그 분노의 본질은 결국 장애인이 사회의 메인스트림에 위치해서 잘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못마땅함이 자리잡고 있진 않을까? 박위 사태를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관점은 ‘장애인에 대한 평소 시선’을 적나라하게 내포하고 있다. 변 작가는 인생 극복 성공 사례로 점철돼 있던 훈훈한 ‘박위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다른 장애인 셀럽을 찾으려는 비장애인의 움직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박위의 유튜브 영상 공개 방식보다) 내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을 두고 캔슬하는 사람들과 언론들이 캔슬에 그치지 않고, ‘다른 모범적 장애인’을 찾는 데 있다. 전직 가수 어느 장애인은 “모든 장애인이 폄훼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자기는 장애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다”더라. 어느 인플루언서는 박위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더 긍정적이더라. 그런 식의 말들. 나는 영상의 의도가 순전히 장애인식 개선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이기 어려운 박위의 기괴한 문제 해결 방식에 얹어, 더 기괴한 비장애인들의 대안 모색 방식을 보면서 기괴함과 동시에 기시감을 느낀다. 전장연을 싫어하던 사람들이 박위를 대안으로 찾았던 코로나 시기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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