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외롭고, 힘든 환자의 말을 들어주세요.”
환자는 아프고 두렵다. 때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치료과정에서 겪은 부당함이나 불편함을 밖으로 꺼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모르고 말한다고 달라질까 하는 막막함에 입을 닫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내고 또 누군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을 때 의료현장은 조금씩 움직였다. 한 사람의 절박한 외침이 공론장이 되고 때로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출발점이 됐다.
대한민국 1세대 환자운동가로 꼽히는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가 이러한 환자들의 목소리와 변화의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9월 1일 출간되는 ‘환자샤우팅카페: 대한민국을 바꾸는 환자들의 목소리’가 바로 그 산물. 이 책은 2012년 시작된 ‘환자샤우팅카페’를 중심으로 환자와 가족의 절박한 호소가 어떻게 사회적 논의와 법·제도의 변화로 이어졌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가족의 투병에서 시작된 20여년의 환자운동
안기종 대표가 처음부터 환자운동가의 삶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아내가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아내의 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환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의료제도의 한계를 마주했다. 결국 8년간 이어온 사법시험 공부를 그만두고 2005년 한국백혈병혈액암환우회 간사로 환자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특정 질환의 문제만 해결해서는 전체 환자의 투병환경과 권리를 개선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환자단체 간 연대에도 힘을 쏟았다. 2010년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창립을 주도했고 현재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와 한국백혈병혈액암환우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자신도 2008년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환자다. 환자의 보호자로 출발해 환자가 됐고 지난 20여년간 환자의 투병과 안전,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왔다.
■“마음껏 말하세요”…26번의 무대가 바꾼 것
그 노력 가운데 하나가 2012년 시작된 ‘환자샤우팅카페’다.
출발은 서울 종로의 작은 카페였다. 항암제 투약오류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절규를 시작으로 의료현장에서 상처받은 환자와 가족들이 하나둘 무대에 섰다.
환자샤우팅카페는 환자가 자신의 고충과 울분, 피해를 마음껏 쏟아내고(Shouting), 참석자들이 이를 듣고 위로하며(Healing), 전문가와 환자단체가 해결책을 함께 찾는(Solution) 보건의료 소통 플랫폼으로 운영됐다.
2012년 첫 행사부터 2025년 8월까지 총 26차례의 무대에 약 60명의 환자와 가족이 올랐다. 이들의 증언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문가 자문과 언론 보도, 환자단체의 입법활동으로 이어졌고 ‘환자안전법’ 제정과 ‘의료분쟁조정법’ 개정 등 실제 법과 제도를 움직이는 힘이 됐다.
이번 책에는 그중에서도 제도 개선으로 이어진 9개의 대표 사례가 담겼다.
환자안전법, 이른바 ‘종현이법’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부터 이를 보완·강화한 ‘재윤이법’, 의료분쟁조정법을 개정한 ‘예강이법’을 비롯해 선택진료제 폐지, 퇴원약 실손보험 보장, 중증질환 산정특례 제도 개선, 폐암치료제 건강보험 등재, 기초생활수급자 진료 거부 문제, ‘동희법’ 개정과 응급의료제도 개선 등의 과정이 소개된다.
■세상 밖으로 나온 60여명의 목소리…그 뒤에는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60여명이 목소리를 내 9개의 제도를 바꿨다’는 성과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숫자 뒤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환자샤우팅카페 무대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야 했다. 의료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야기, 치료과정에서 겪은 좌절과 차별, 치료제가 있어도 비용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현실까지 개인에게는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경험들이다.
실제로 책에 담긴 환자와 가족의 증언을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상에 들린 목소리만으로 환자의 현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환자샤우팅카페에 설 기회가 없었던 사람, 자신의 경험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사람, 목소리를 냈지만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책에 기록된 환자들의 목소리는 어쩌면 지금도 수면 아래에 있는 수많은 목소리를 대신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환자의 말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환자의 말에서 출발하는 ‘환자중심 의료’
안기종 대표가 강조하는 환자중심 의료 역시 환자를 특별대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책에서 환자나 보호자가 원하는 것은 백화점 VIP와 같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낯설고 불안한 병원에서 자신의 말이 무시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환자샤우팅카페 역시 환자의 울분을 듣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환자와 가족에게는 말하고 공감받는 공간이 됐고 사회에는 보건의료 제도와 법률의 문제를 논의하는 공론장이 됐다. 나아가 환자가 직접 참여해 환자중심의 보건의료환경을 만들어가는 실천의 장으로 확장됐다.
안기종 대표는 지금도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정부의 주요 법정위원회에서 환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2027년 4월 29일 시행을 앞둔 환자기본법 제정 과정에도 환자와 환자단체의 목소리가 반영됐다. 그런 점에서 이번 책은 한 활동가 개인의 기록이라기보다 지난 20여년간 환자들이 의료의 객체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와 필요한 변화를 직접 말해온 과정의 기록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안기종 대표는 “환자샤우팅카페는 샤우팅한 9명의 환자와 가족만의 기록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법과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끝까지 붙잡았던 환자단체 활동가들의 기록이기도 하다”며 “우리의 이야기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이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환자들의 외침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 목소리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말했고 누군가는 들었으며 또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아직 수면 아래에는 세상에 닿지 못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따라서 환자샤우팅카페가 기록한 지난 시간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환자의 목소리를 얼마나 귀담아듣고 그 목소리가 의료현장과 정책에 닿을 수 있는 통로를 얼마나 넓혀갈 것인가.
책은 이제 그 질문을 우리 사회에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