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한글을 말할 때 흔히 ‘과학적인 문자’라는 표현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적 가치는 글자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누가, 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는지, 글자는 어떤 원리로 설계됐는지, 그 사용법은 무엇인지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의 창제 결과와 그 설명을 함께 전하는 문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의 창제 취지를 담은 ‘예의’와 새 글자의 제작 원리와 운용 방식을 풀이한 ‘해례’로 구성됐다. 한글을 알리는 책인 동시에, 문자가 탄생한 배경과 방법을 후대에 전달하는 기록유산이다.
세계의 많은 문자는 오랜 시간 변화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반면 훈민정음은 창제 시기와 목적, 제작 원리를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례본’의 역사적 가치는 바로 이 기록성에서 출발한다.
■문자의 탄생을 기록한 시대
‘훈민정음’ 창제는 15세기 조선의 문자 생활과 맞닿아 있었다. 당시 공식적인 문자 생활은 한자를 바탕으로 이뤄졌지만, 한국어의 소리를 그대로 적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맞지 않아 백성이 자신의 뜻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현실을 밝혔다. 새 문자의 창제는 말을 보다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마련하려는 국가적 선택이었다.
‘해례본’은 이 선택이 새 글자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자 하나하나의 구성 방식과 소리 체계, 글자를 결합하는 방법까지 설명해 누구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형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모음의 기본자는 하늘과 땅, 사람을 뜻하는 천·지·인의 개념과 연결됐다. 소리의 특성과 당시의 자연관이 문자 제작 원리 안에 함께 담긴 것이다.
이 때문에 ‘해례본’은 언어학 자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소리를 관찰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문자 원리에 적용한 당시 조선의 지적 성취를 보여주는 문화사 자료다.
말소리는 발화와 함께 사라지지만 문자는 기록으로 남는다. 훈민정음은 말을 적는 방식을 새롭게 마련했고, 해례본은 그 방식을 다시 글로 설명했다. 언어를 문자로 옮기고, 문자 창제의 원리까지 기록한 이중의 기록이 한 권의 책 안에 담긴 셈이다.
■한글 안에 담긴 시대의 지식과 세계관
‘해례’는 집현전 학자들이 새 문자에 담긴 원리를 정리한 부분이다. ‘제자해’는 글자를 만든 방법을 설명하고, ‘초성해·중성해·종성해’는 각각의 소리 체계를 풀이한다. ‘합자해’는 글자를 결합하는 방법을, ‘용자례’는 실제 쓰임을 다룬다.
이 같은 구성은 한글 창제가 문자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이를 설명하고, 실제 사용법까지 정리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특히 해례본은 한문으로 작성됐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학술 언어로 새로운 문자 체계의 원리를 정리한 것이다. 백성이 자신의 말을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든 글자를 당대의 학문적 언어로 해설했다는 사실은 조선의 문자 문화가 가진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음의 기본 원리에 담긴 천·지·인의 개념 역시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하늘과 땅, 사람의 관계를 문자 체계와 연결한 방식은 훈민정음이 당시의 세계관과 분리된 결과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자음의 설계에는 발음 기관에 대한 관찰이, 모음의 설계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됐다. ‘해례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글자의 모양만이 아니라, 15세기 조선이 언어와 인간, 세계를 바라본 방식이다.
한글은 이후 조선 사회의 언어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계층과 분야에서 사용됐고, 근대 이후에는 한국어를 기록하는 대표 문자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한글의 문화적 확산을 이해하는 출발점 역시 창제 당시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잃어버린 설계도에서 세계의 기록유산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랫동안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면서 한글 창제 원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세상에 드러났다.
발견 이후 해례본은 한글 연구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창제 목적과 글자의 제작 원리를 추정이 아닌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송본’으로 불리는 원본은 국보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한 나라의 문자 자료를 넘어 인류가 함께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는 한글의 독창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문자 창제의 목적과 원리, 사용 방법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긴 자료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글은 교육과 출판, 행정, 방송, 디지털 환경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사용된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글자의 탄생 과정과 그 뒤에 남은 기록을 의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은 익숙한 문자 뒤에 한 시대의 학문과 문화, 국가의 기록 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글자는 세종의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그 글자를 만든 이유와 방법을 담은 기록은 오늘까지 이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대함은 한글을 설명한다는 데만 있지 않다. 한 시대가 새로운 문자를 어떻게 만들었고, 왜 그 원리를 후대에 남기려 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한글이 현재형의 문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백 년 전 남겨진 이 설계도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글자의 사용법을 기록한 책을 넘어, 한국의 문자 문화가 어떤 역사적 기반 위에서 이어져 왔는지를 증명하는 문화유산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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