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자본과 기술, 생산성과 시장 점유율이 성장을 설명하는 핵심 지표였다면, 이제 기업은 서로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성별과 세대, 국적과 지역, 언어와 생활환경의 차이는 더 이상 조직 안에서 관리해야 할 변수가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 만나 새로운 제품과 콘텐츠, 시장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문화다양성은 사회적 가치의 영역을 넘어 기업 경영의 변화 속에서도 중요한 경쟁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ESG를 넘어 경쟁력이 된 문화다양성
ESG 경영이 기업의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문화다양성 역시 사회적 책임의 주요 과제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ESG의 ‘S’, 즉 사회적 가치 영역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은 기업이 구성원과 소비자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됐다. 차별을 줄이고 다양한 구성원의 참여를 보장하는 일은 이제 기업 윤리의 문제를 넘어 장기적인 경영 전략으로 연결되고 있다.
기업이 문화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시장 자체가 빠르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평균적인 소비자를 상정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고령층과 청년층, 지역별 소비자, 다양한 언어권과 생활문화를 가진 이용자들이 서로 다른 요구를 드러내면서 기업 역시 보다 세밀한 시장 이해가 필요해졌다.
이 과정에서 다양성은 새로운 고객을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 기존 기업이 주요 소비자로 설정하지 않았던 집단의 경험을 이해하는 순간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정 이용자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이나 디자인이 더 넓은 소비자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양성 경영은 기업 내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서로 비슷한 경험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조직은 의사결정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문화와 경험을 가진 구성원이 함께 일하면 기존의 기준을 다시 살펴보게 된다. 기업이 당연하게 여겼던 문제 정의부터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람을 채용하는 데서 변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직 안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실제로 발언되고 의사결정에 반영될 수 있어야 다양성은 경쟁력이 된다. 기업이 구성원의 배경을 보여주는 것보다 각자의 경험과 시각을 경영에 활용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은 왜 ‘다른 시선’에 투자하는가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일수록 문화다양성의 필요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체감한다. 같은 브랜드와 제품이라도 국가와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언어와 생활습관, 사회적 가치와 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글로벌 시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장벽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접근성과 포용적 디자인을 제품 개발 과정의 중요한 가치로 제시해 왔다. 장애 유무나 사용 환경의 차이를 고려해 제품을 설계하는 접근은 특정 이용자만을 위한 기능에 머물지 않는다. 다양한 이용자의 경험을 폭넓게 고려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서비스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니레버 역시 글로벌 시장의 다양한 문화와 소비자 특성을 반영하는 브랜드 전략을 펼쳐온 기업으로 꼽힌다. 여러 국가에서 서로 다른 생활방식과 소비 습관을 이해하는 일은 제품 개발과 마케팅의 출발점이 된다. 하나의 본사 기준을 전 세계 시장에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각 지역 소비자의 문화적 맥락을 읽는 것이 글로벌 경쟁력과 연결되는 셈이다.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다. CJ는 다문화 인식 개선 기부 캠페인 ‘CJ가 만들어가는 하나의 세상, 앙상블’을 통해 이주배경 아동·청소년의 문화 경험 확대와 포용·공존 가치 확산에 힘쓰고 있다.
이 같은 기업 사례는 문화다양성이 별도의 사회공헌 활동이 아니라 실제 사업 전략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구성원과 소비자의 관점을 조직 안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새로운 시장을 찾는 동시에 기업이 놓칠 수 있는 위험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문화다양성은 기업의 위험 관리와도 관련이 있다. 특정 문화권의 기준만으로 광고와 제품, 서비스를 기획할 경우 의도하지 않은 오해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다양한 시각이 기획과 검토 단계에 참여하면 기업은 놓치기 쉬운 문제를 보다 이른 시점에 발견할 수 있다.
기술기업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중요하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서비스가 일상 깊숙이 들어오면서 기술을 설계하는 사람의 관점은 더욱 큰 영향을 갖게 됐다. 데이터와 알고리즘, 사용자 환경에 특정 집단의 경험만 충분히 반영될 경우 다른 이용자에게 불편이나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다양성은 기술의 공정성과 서비스의 완성도를 높이는 문제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배경의 개발자와 기획자, 사용자 경험을 이해하는 전문가가 참여할수록 기업은 더 넓은 관점에서 제품을 설계할 수 있다. 기술이 복잡해질수록 ‘무엇을 만들 것인가’뿐 아니라 ‘누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문화다양성은 브랜드의 신뢰와도 연결된다. 소비자는 기업이 내놓는 광고와 캠페인뿐 아니라 실제 조직문화와 사회적 대응을 함께 바라본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기업이 내부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경우 브랜드가 쌓아온 신뢰 역시 흔들릴 수 있다. 결국 다양성 경영은 외부 홍보보다 기업 내부의 제도와 문화에서 먼저 증명돼야 한다.
■콘텐츠 산업, 다양성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다
콘텐츠 산업은 문화다양성의 변화가 가장 빠르게 드러나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영화와 드라마, 음악과 게임, 출판과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누가 이야기를 만들고 어떤 삶을 콘텐츠에 담아내는지에 따라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 역시 달라진다.
디지털 플랫폼과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은 콘텐츠 소비의 국경을 크게 낮췄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가 세계 각국의 시청자와 만나고, 해외의 다양한 이야기가 국내 시장으로 들어오는 환경에서 제작자 역시 하나의 문화적 기준만을 전제로 작품을 만들기 어려워졌다.
콘텐츠 기업에 문화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소재를 발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인물과 반복되는 서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세대와 지역, 언어와 생활환경의 경험을 담아낼수록 콘텐츠가 다룰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진다.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이야기가 새로운 작품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성의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모두에게 똑같이 익숙한 이야기가 보편적인 콘텐츠라는 공식은 약해지고 있다. 오히려 특정 지역과 문화,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담아낸 작품이 다른 문화권의 관객에게 새로운 감정과 공감을 전달하기도 한다.
K-콘텐츠 역시 다음 단계의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한국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해외 관객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번역과 자막, 접근성, 캐릭터의 재현, 글로벌 이용자의 콘텐츠 소비 방식까지 제작과 유통 전반에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콘텐츠 산업의 다양성은 화면 속 인물을 늘리는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기획자와 작가, 제작진, 배우와 플랫폼 운영자 등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에 다양한 경험이 참여할 때 더 넓은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표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창작과 의사결정의 기회를 넓히는 일이다.
■다양성이 혁신을 만드는 기업의 미래
문화다양성이 기업의 혁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인다고 자동으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기업 안에서 차이를 존중하고 다른 의견을 검토하며,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조직문화가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다양한 경험은 서로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한다. 하나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해결 방법 역시 다양해진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기존 시장에서 보이지 않았던 소비자의 요구를 찾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이 만나는 과정에서는 때때로 충돌도 발생한다. 그러나 기업이 이를 조직의 부담으로만 보지 않고 토론과 학습의 과정으로 활용한다면 차이는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자원이 될 수 있다. 혁신적인 조직이란 모든 구성원이 같은 생각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기업의 성장에 활용할 수 있는 조직에 가깝다.
앞으로 기업의 문화다양성은 채용 비율이나 ESG 보고서의 수치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구성원이 실제로 성장의 기회를 얻고 있는지, 의견이 경영 과정에 반영되는지, 소비자의 서로 다른 경험이 제품과 콘텐츠에 담기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기업이 문화다양성에 투자하는 것은 사회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변화하는 시장에서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고객을 이해하며, 미래의 산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투자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이 만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그 가치가 다시 사회와 산업의 변화를 이끈다. 기업의 경쟁력은 모두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을 읽어내는 기업이 다음 시대의 혁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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