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지난 7월, 인사동 갤러리재재에서 열린 단체전 ‘재재: 다시 봄(JeJe: Re-View)’에 참여하며 관람객들과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람객이 직접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부채 컬러링’ 이벤트를 진행한 것이다.
이번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부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미리 그려진 도안을 따라 자유롭게 색을 입혀 자신만의 부채를 완성하는 체험이었다. 여름에 잘 어울리는 부채라는 소재도 좋았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누구나 부담 없이 그림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점이었다. 미술 체험을 진행하다 보면 생각보다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려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아쉽다. 언제부터 우리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과 못 그리는 사람으로 나누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에는 색연필 하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그림을 그리고 색칠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흰 종이 앞에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부터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어떤 색을 선택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컬러링 방식을 택했다. 이미 도안이 있기 때문에 그림에 자신이 없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도안이라고 해서 결과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선명하고 화려한 색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차분한 색으로 채운다. 같은 포도 한 송이도 누군가에게는 보라색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빨강, 노랑, 초록이 섞인 상상의 포도가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나는 참 재미있었다.
도안은 같아도 색은 모두 달랐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부채 컬러링을 진행하면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색도 다르고, 색을 조합하는 방식도 다르다. 정답이 없는 선택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세상에 하나뿐인 부채가 완성된다.
나는 그 과정이 우리의 삶과도 조금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나는 오랫동안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행복에도 정해진 색이나 모양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행복은 아주 화려한 색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잔잔한 색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색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색을 스스로 선택해 보는 것이 아닐까.
컬러링을 하는 동안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냈다. “이 색이 더 예쁠까요?”, “여기는 어떤 색을 칠하면 좋을까요?” 하고 묻기도 했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완성된 부채를 펼쳐 바라보는 순간의 표정에는 작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술이 꼭 어렵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을 바라보는 것도 예술을 경험하는 방법이지만, 직접 색을 고르고 손을 움직여 보는 것 역시 충분히 예술을 만나는 방법이다. 몇십 분 동안 색 하나를 고민하고, 천천히 빈 공간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다른 생각은 잠시 잊고 눈앞의 색과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그 짧은 몰입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휴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부채는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는 생활용품이지만, 그 위에는 그날 자신이 선택했던 색과 시간이 함께 남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져간 것이 단순히 부채 하나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완성했다’는 작은 성취감, 색을 고르며 잠시 집중했던 시간, 전시장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까지 함께 가져갔으면 했다.
이번 부채 컬러링을 진행하면서 나 역시 관람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쳤다기보다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은 밑그림도 누가 어떤 색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복 역시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가 정해 준 행복의 모습을 따라가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색을 하나씩 찾아가며 나만의 삶을 채워 가는 것. 7월의 어느 여름날, 갤러리재재에서 완성된 부채들처럼 우리 모두의 삶도 같은 모양일 필요는 없다.
도안은 같아도 색은 다르다. 그리고 바로 그 다름 속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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