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체험 삶의 현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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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체험 삶의 현장'인가

프레시안 2026-08-18 12:5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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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흉터가 몇 개 있다. 종아리의 상처는 비 오는 날 신문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가 넘어지면서 다리가 배기통이 깔렸을 때 생긴 화상 자국이다. 새끼손가락의 상처는 신문을 상가 철체 셔터 안으로 밀어 넣고 빼다가 날카롭게 배인 흔적이다. 23년 전 일인데, 그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뜨거워서? 아파서? 파상풍 걸릴까 두려워서? 아니다. 그런들 그만두지 못해서다. 나는 화상을 입은 그날은 물론이고 병원 가서 치료받고 다음날도 배달했다. 피 나는 손가락을 비 올 때 신문 집어넣는 비닐봉지로 둘둘 말고 오토바이를 몰았다. 물론 다음 날에도. 다음 계절에도, 다음 해에도. 내겐, 퇴로가 없었다.

4년간 하루 4~5시간씩 신문 배달을 했다. 어느 날 근처 대학을 다닌다는 청년 한 명이 아르바이트를 해 보겠다며 보급소에 왔는데, 힘들었는지 금방 잠수를 탔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지국장과 경험 많은 배달원들이 급한 불부터 끈다. 내 일 아니라고 따질 수도 있지만 일터라는 곳이 그리 기계적으로 돌아가겠는가. 누가 배로 고생하는 걸 지켜만 볼 수도 없으니, 투덜거리면서 어떻게든 해결한다. 그 학생을 우연히 캠퍼스에서 만났다. 왜 그만뒀냐면서, 그쪽 때문에 고생 많았다고 슬쩍 이야기를 꺼내니 당당하게 이런다.

"에이, 그냥 경험해 보려고 한 건데요."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다. 천 원내대표는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처음으로 논산 육군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해 2박 3일간 신병 교육을 받았다. ⓒ연합뉴스

아직도 '체험 삶의 현장'인가

천하람 국회의원이 군대를 간다는 뉴스를 접하고 처음엔 나이 서른 다 채워서 가는 뒤늦은 입대인 줄 알았다. 1986년생이니 그런 건 아니고, 2박 3일 훈련소 체험이란다. 국방위원회에 배치되었기에, 현장에서 현역병들의 고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라는데 국회의원이면 이런 것도 가능한 모양이다. 요즘 군대 좋아졌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취지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2010년, 차명진 국회의원은 쪽방촌 1박 2일 체험을 하면서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라고 소회를 밝혀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당시 차 의원은 지급받은 돈을 남길 정도로 알뜰했고 본인 스스로도 이게 현실의 당사자에게 가능한 여유가 아니란 점을 밝혔지만 여론은 냉랭했다. '가난하면, 가난한 주제를 알고 아끼고 살면 될지어다'라는 케케묵은 사회적 편견을 더 강화하는 연료를 주입했기 때문이다. 천 의원이 설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된다는 말을 하려고 야단법석을 떠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흔 살 국회의원이 훈련병 되겠다며 머리 깎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는 판국에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없다. 군대에서 밥 먹는, 총검술 하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는 상황에서, 현실을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2박 3일이 아닌 20박이라도, 아니 2년이라도 말이다. 사례를 수집해 해석한들 이미 오염된 현장이기에 일반화는 오히려 위험하다. 남은 건 그저 본인 선거 홍보책자에 넣을 여러 장의 사진뿐이리라.

정치쇼라고 생각하긴 싫지만, 2박 3일 체험 삶의 현장은 그런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아니라고? 국회 17개의 상임위원회에서 이런 방식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치자. 나 국회의원이니, 주거 공간의 열악함을 이해하고자 고시원에 살아보겠소. 나 국회의원이니, 재소자의 처우를 제대로 보고자 감옥에 가겠소. 나 국회의원이니, 노동자 고충을 듣고자 물류센터에서 일하겠소. 나 국회의원이니, 여성들의 차별을 알고자 성별 차별에 심하다는 기업에서 일을 해 보겠소. 나 국회의원이니,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보겠소. 파견업체 직원이 되어 보겠소. 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해 보겠소. 아이고 끔찍해라. 아, 이건 이미 흔하기에 다들 알 거다. 장애인 이동의 문제를 느껴 보겠다며 국회의원들이 휠체어 타 보는 쇼 말이다.

누군가의 삶을 체험하면 엄청난 걸 발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특권이다. 흉내 내는 건 흉내 내는 것으로 끝내야 한다. 고작 이런 경험으로 뭘 알 수 있을까, 던질 질문은 이게 유일하다. 하지만 권력을 지니면 해석도 빠르다. 체험을 차명진은 자랑으로 승화했고 천하람은 고발의 연료로 쓰려고 하지만, 두 개 모두 전제는 같다. 타인의 경험을 소유할 수 있다는 구조적 위치라는 오만함 말이다. 그리고 그 오만함을 모르는 무례함까지.

구조적 위치는 진정성으로 변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치가 높은 쪽에서 아래쪽을 체험할 때, 특히 그 낙차가 클수록 착각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하며, 본인이 어떤 곳에 서 있는지를 망각한다. 지지자들은 이를 감동이라며 포장하지만, 관람자들은 찝찝함을 느낀다.

국회의원이 쪽방촌을, 국회의원이 훈련소를 체험한다고 했을 때 어찌 불쾌감이 스쳐가지 않겠는가. 박완서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가난한 척하면서 공장 노동자와 동거하는 1970년대 서울대 학생을 묘사한다. 상대가 수치심을 느끼든 말든, 자신은 선의였다고 생각하는 무례함 덩어리의 엘리트로 말이다. 지금과 많이 다른가?

▲개혁신당 천하람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다. 천 원내대표는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처음으로 논산 육군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입소해 2박 3일간 신병 교육을 받았다. ⓒ연합뉴스

학출 노동자의 상징도 시효가 끝났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축했는지 강연할 때 막히는 부분이 있다. 정치적 민주화야, 독재에 저항하는 굵직한 사례를 바탕으로 언급하면 예나 지금이나 집중을 잘 한다. 4.19, 5.18, 6.10 같은 사건들이 너무 굵직해서 나는 저렇게 못하겠다며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목숨 걸고 투쟁한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가능하다는 걸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 분야를 설명할 때는 아니다. 노동 현장의 부당함이 조금씩 개선되는데 1970~1980년대 학출 노동가의 활약상이 중요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말하면,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꽤나 있다. 서울대 학생임을 숨기고 공장에서 일하는 게 사실이냐면서 의심해서가 아니다. 노동자를 기만한다고 여겨서다. 떠도는 질문을 압축하면 이렇다. "노동자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 노동자가 되어야만 했던 사람을 어떻게 대변한단 말이죠?“

높으신 분이, 절대 경험하지 않을 분야의 당사자 되기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다는 반응이 따라왔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신기함은 신분의 격차가 너무나 컸던 시절엔 종종 존경심으로 확장되곤 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음에도 정치인들은 여전히 민생 탐방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사자 되기가 아니라, 당사자가 직접 말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본인 일임에도 말이다.

당사자가 말하는 구조에선 정치인 본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어서일까? 그들은 예능 프로그램 쇼츠 영상처럼 즉시 유통 가능한 콘텐츠를 강박적으로 찾는다. 이왕이면 머리도 깎고, 총들 들어보면서 말이다. 차라리 영화 <무간도>, <디파티드>, <신세계>처럼 입대할 청년 한 명을 정보원으로 고용해 모든 걸 기록하고 보고하라는 게 훨씬 나을 거다. 아니면 본인 휴대폰 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군대 내 모든 화장실마다 붙여 놓고 언제든지 전화하라는 게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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