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의 전제 조건으로 미군 병력 철수와 대이란 제재 전면 해제, 전쟁 피해 배상 등을 미국에 전격 요구하고 나섰다. 인접국 오만과의 통항 재개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무색하게, 최종 개방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며 ‘벼랑 끝 전술’로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모양새다.
9일(현지시간) 이란 국영 IRNA 통신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 모하마드 바게르 졸가드르 사무총장은 전날 국영 매체를 통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6대 요구 사항이 담긴 성명을 공식 발표했다. 해당 성명에서 이란은 ▲미국의 해상 봉쇄 및 제재 즉각 해제 ▲이란 주변 지역 미 해군·공군 등 병력 전면 철수 ▲두 차례의 ‘침략 전쟁’에 대한 피해 배상 ▲이란 동결 자산의 조건 없는 반환 ▲레바논, 팔레스타인, 예멘, 이라크 등 역내 이란 동맹국에 대한 군사 공격 영구 중단 ▲이란을 향한 모든 위협 및 종교적·국가적 모욕 중단 등을 강력히 촉구했다.
특히 졸가드르 사무총장은 “미국이 행동을 바로잡을 때까지 호르무즈 해협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는 앞서 미국과 이란이 맺었던 종전 양해각서(MOU)에 명시된 ‘최종 핵 합의 일정에 맞춘 단계적 제재 종료’ 구상보다 한층 강경해진 ‘선(先)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의 기습적인 강경 성명은 해협 통항 재개와 관련해 인접국인 오만과의 중재 협상이 타결에 근접한 가운데 불거졌다. 압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테헤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지금 미국과 직접 협상하고 있지 않으며 중재자를 통한 메시지 교환만 있을 뿐”이라고 선을 그은 뒤 “미국이 MOU 위반 행위를 멈추고 위반 사항을 배상할 때까지 협상 재개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측 역시 “적이 우리의 모든 조건을 수용할 때까지 해협을 사수하는 전략을 이어가겠다”고 경고했다.
미국 역시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같은 날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걸프 지역 국가들과 안전한 선박 통항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면서도 “전쟁 초기 이란이 대량으로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고 파괴된 해상 교통 체계를 정비하는 작업이 선행돼야만 통항 정상화가 가능하다”며 이란의 선제적 조치를 요구해 양측의 팽팽한 기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이란이 막판 무리한 요구안을 내세우며 통항 정상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감은 다시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핵심 병목인 호르무즈 해협의 물류 마비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경제적 파장 우려도 커지는 상황이다.
실제 해운 데이터 분석 업체 케이플러(Kpler)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지난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하루 평균 10여 척에 불과해 전쟁 이전 통행량의 10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과 이란 간의 이견이 획기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한 해협을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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