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빠르게 바뀌는 시대 속에서 오래된 것은 종종 뒤로 밀려난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붙잡아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0일부터 14일 밤 9시 35분 방송되는 EBS1 ‘한국기행-토종로드’는 우리 땅에서 태어나 오랜 세월을 견뎌온 토종의 의미를 다시 꺼내 든다. 먹거리나 품종을 넘어, 사람의 기억과 선택이 이어온 시간의 기록을 따라간다.
방송은 토종을 ‘지키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새롭게 시도하고, 실패를 견디며, 다시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농부의 손끝에서, 가족의 생계 속에서, 장인의 고집 속에서 이어진 다섯 개의 이야기가 한 편의 긴 여정을 완성한다.
■ 복분자의 시간을 되돌린 선택
전북 고창의 여름은 붉다. 잘 익은 복분자가 밭을 가득 채우는 시기, 오영은 씨의 밭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는 흔히 재배되는 품종 대신, 어린 시절 산에서 따 먹던 토종 복분자를 다시 길러내기 시작했다.
한때 ‘스타 농부’로 불릴 만큼 성공적인 재배를 이어왔지만, 예상치 못한 변화가 찾아왔다. 작물의 활력이 떨어지고 품질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과거로의 회귀였다. 익숙했던 토종이 해답이 됐다.
토종 복분자는 강했다. 외래종보다 생명력이 뛰어나고 열매의 풍미도 깊었다. 수확량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오영은 씨는 다시 밭에 활기가 돌아오는 과정을 몸으로 체감했다.
그의 하루는 수확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공까지 직접 맡으며 복분자의 가능성을 넓힌다. 샐러드와 식혜로 재탄생한 토종 복분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소비자와 만난다.
“복분자에 인생을 걸었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한 번의 선택이 농사의 방향을 바꾸고, 그 변화가 다시 지역의 미래로 이어진다.
■. 가족이 지켜낸 우리흑돈의 가치
경북 경산의 한 농장. 이곳에서는 돼지는 가축이 아니다. 박복용 씨 가족에게 ‘우리흑돈’은 함께 살아온 시간의 결과이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든 버팀목이다.
검은 털과 단단한 체형을 가진 우리흑돈은 토종돼지로 공식 인정받은 품종이다. 흔히 알려진 흑돼지와는 다른 고유의 특성을 지닌다. 가족은 사육부터 가공, 판매까지 전 과정을 나눠 맡으며 하나의 시스템을 완성했다.
지금의 안정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한때는 통장 잔액이 거의 바닥났던 시기도 있었다. 위기를 버틴 끝에 남은 것은 토종돼지였다. 그 선택이 결국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농장은 생산 공간을 넘어 삶의 터전이 됐다. 막내아들은 사육을 돕고, 큰아들은 가공을 맡는다. 아내는 식당을 운영하며 소비자와 직접 만난다. 역할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출산을 앞둔 어미 돼지 곁에 가족이 모이는 순간은 이들의 시간을 상징한다. 긴 기다림 끝에 태어나는 새 생명은 이어지는 역사다.
■ 안동, 익숙함 뒤에 숨겨진 얼굴
안동은 오래된 도시다. 유교 문화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는 이곳에서 ‘토종’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의 기억이 함께 엮여 있다.
가수 김범룡과 함께 떠난 여정은 예상 밖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예안향교에서 만난 ‘안동 무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안에는 독립운동의 기억이 스며 있다.
이육사 시인의 흔적도 이어진다. 후손이 가꾸는 포도밭과 와인은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로 끌어온다. 문학과 농업이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안동 국시는 여전히 손으로 만들어진다. 홍두깨로 밀어낸 면과 깊은 국물은 시간의 축적을 보여준다. 빠르게 만들어지는 음식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안동은 더 이상 교과서 속 도시가 아니다. 익숙한 이름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 토종 씨앗으로 이어진 공동체
경기도 화성 궁평리마을. 정용락 씨의 밭은 보기 드문 작물들로 가득하다. 흑수박, 수원가지, 조선오이까지 쉽게 접하기 어려운 토종 작물들이 자란다.
그는 13대째 농사를 이어온 집안의 농부다. 처음에는 맛 때문에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토종을 지키는 일이 곧 미래를 남기는 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밭은 일종의 보관소가 됐다. 사라질 수 있는 씨앗을 이어가기 위한 공간이다. 수확은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이 마을의 특징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토종을 키우는 사람들이 서로 씨앗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한다.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됐다.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왜 이 일을 계속하는지에 대한 답은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인다.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한다는 책임이다.
■ 600년 전통을 되살린 기다림
강원 삼척의 산 깊은 곳. 접근하기 쉽지 않은 이곳에서 박병준 씨 부부는 ‘불술’을 빚는다.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주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주인공들이다.
복원 과정은 쉽지 않았다.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기억을 모으고, 수차례 실패를 반복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졌다.
불술의 핵심은 물이다. 삼수령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세 개의 강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다. 그 물이 술의 맛을 결정한다.
제조 방식 역시 오래된 방식을 따른다. 왕겨에 불을 지피고, 긴 시간을 들여 숙성한다. 약 100일의 기다림 끝에 완성되는 술은 빠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방식이다.
비 오는 날, 산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은 600년의 시간을 함께 마시는 경험에 가깝다. 감자전 한 접시와 어우러진 그 맛은 오래된 방식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기행-토종로드’는 과거를 회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선택과 노력의 기록이다. 사라질 수도 있었던 것들이 사람을 통해 다시 이어진다. 그 연결이 모여 하나의 길을 만든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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