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제주 한 골목, 작은 국밥집 앞은 하루에도 몇 번씩 소란스러워진다. “영자 씨!”를 외치며 뒤쫓는 남편의 발걸음 때문이다. 사라지듯 가게를 빠져나가는 아내와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는 남편. 반복되는 이 짧은 추격은 어느덧 부부의 일상이 됐다.
오는 10일부터 14일 오전 7시 50분 방송되는 KBS1 ‘인간극장’은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와 그 곁을 지키는 남편, 그리고 한 가족의 시간을 따라간다.
■47년, 그리고 달라진 하루
홍순업 씨의 하루는 늘 긴장 속에서 시작된다. 4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아내 이영자 씨는 잠깐의 틈에도 자리를 벗어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순업 씨는 국밥집을 지키고 아내를 돌본다.
두 사람의 시작은 서울의 한 공장이었다. 스무 살 청춘이었던 순업 씨는 제주에서 온 영자 씨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이내 부부가 됐다. 생계를 위해 내려온 제주에서 영자 씨는 생선 장사부터 공장 일, 국밥집 운영까지 쉴 틈 없이 살았다.
시간이 흐르며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졌지만, 순업 씨의 마음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고생만 시킨 것 같다”는 미안함이 그의 하루를 움직인다.
■가족이 만든 든든한 울타리
영자 씨 곁에는 남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아주버님들과 형수님들까지 한데 모여 자연스럽게 돌봄의 손길을 보탠다.
가게 앞에서 영자 씨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이는 바로 시아주버님. 산책을 함께하고, 화장실 앞까지 기다리는 모습은 이미 오래된 친구처럼 자연스럽다. 제주로 내려와 함께 터를 잡은 형제들은 매일같이 들러 시간을 나누고, 요리로 식탁을 채운다.
형수님들은 과일을 깎아 먹이고 목욕을 돕는다. 혈연 이상의 관계가 만들어낸 이 가족의 방식은, 병을 함께 견디는 또 다른 힘이 된다.
1년 만에 제주를 찾은 셋째 형과의 재회는 또 하나의 순간을 만든다. 기억이 이어질지, 끊길지 알 수 없는 만남 속에서도 가족은 그저 곁에 머문다.
■잊혀도 남기를 바라는 이름
늦은 밤 찾아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순업 씨의 표정은 조용히 무너진다.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현실은 가족 모두에게 아픈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매일 아내에게 영양제를 챙기고, 식탁에 마주 앉아 글자를 적는다. 다른 이름은 엇갈려도 ‘홍순업’ 세 글자는 또렷하게 적어내는 아내를 보며, 그는 작은 희망을 붙든다.
“이 이름만은 남아주길.”
그의 바람은 단순하지만 깊다.
바다를 찾은 어느 날, 부부는 모래 위에 서로의 이름을 적는다. 파도가 지나가며 글자를 지워도, 다시 적는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 동작은 기억이 사라져도 이어지고 싶은 관계의 표현이다.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옅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은 끝까지 남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라짐 속에서도 이어지는 사랑의 형태를 조용히 보여준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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