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전세라 기자】 예술은 쉽게 지나치고 평범한 것들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죠.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오래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의 평범한 움직임을 하나의 풍경으로 묶어내며, 외면하고 싶었던 삶의 변화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데요. 그렇게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이번 주 [TN 위클리 컬처]에서는 평범한 하루와 익숙한 삶의 장면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잔잔한 일상을 담아낸 영화부터 수많은 사람의 휴식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한눈에 펼쳐 보이는 전시, 우리 사회가 ‘늙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날카롭게 되묻는 연극까지. 이번 주도 어김없이 ‘무엇을 볼까’,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엄선한 문화예술 소식을 지금 바로 전해드립니다.
영화 지난 여름
계절이 흐르는 속도로
우리는 흔히 영화에서 특별한 사건을 기다립니다. 누군가의 삶이 크게 흔들리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어나야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영화와 달리 우리의 일상은 꽤나 단조롭습니다. 같은 출퇴근길, 같은 풍경이 반복될 뿐이죠. 이러한 도심과 달리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는 모를 심고 비를 기다리고 가뭄과 장마를 견디면서 계절과 함께 흘러갑니다. 자연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잔잔한 일상을 담아낸 영화가 관객을 찾아왔습니다.
최승우 감독의 영화 <지난 여름> 은 농번기를 맞은 늦봄의 강원도 홍천군 작은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민우와 그의 가족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싦을 따라가며 특별한 사건을 앞세우기보다 자연의 섭리에 맞춰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담아내는데요. 매일 아침 면사무소로 출근하는 민우와 논에서 모를 심는 농부들, 축사를 돌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농촌에서 이어지는 삶의 리듬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지난>
영화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시선입니다. 산 너머로 떠오른 햇빛이 논 위에 내려앉는 장면부터 가뭄과 장마로 변화하는 풍경까지. 카메라는 자연을 극적인 배경으로 소비하기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처럼 기록하는데요. 맑은 색감과 넓게 펼쳐진 농촌 풍경 사이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하며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내죠.
무언가를 강조하지 않는 태도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영화는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크리틱b상을, 2024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관심을 받았는데요. 극적인 갈등이나 자극적인 사건 대신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대로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내는 느린 시간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 <지난 여름> 은 현재 일부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지난>
전시 이상원 개인전 <레스토피아 : restopia>레스토피아>
그 여름 바닷가에서 생긴 일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바다는 여름 휴가지의 대표적인 장소인데요. 해변을 가득 채운 파라솔과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휴식을 보내는 사람들이 어느새 하나의 거대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평범한 휴식이 모여 색채와 움직임이 어우러진 풍경으로 변하는 순간을 오랫동안 그림으로 기록해 온 작가가 있습니다.
이상원 작가의 그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작가는 공원과 수영장, 해변, 스키장처럼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공간을 주로 그려왔는데요. 얼굴과 이목구비가 생략된 인물들에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 보면서 작품 속 풍경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죠.
작품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부감 시점인데요. 작가는 의도적으로 높은 시점을 선택해 관객에게 마치 공중에 떠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수많은 사람과 풍경을 한눈에 담다 보면 한 사람의 행동보다는 화면 전체가 만들어 내는 리듬과 움직임이 먼저 눈에 들어오죠.
이러한 거시적인 시선은 관객에게 생각의 여백을 더욱 넓혀주는데요. 해변이나 수영장에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기억이 떠오릅니다. 누군가와 함께했던 여행이나 혼자 여유롭게 보냈던 시간의 나를 작품 속 인물 옆에 배치해 보게 되는데요. 작가의 풍경은 특정 장소를 기록한 그림을 넘어 우리가 경험했던 휴식의 기억을 다시 꺼내보는 공간이 되죠.
화면을 이루는 유화의 물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상원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두텁게 올리고 빠르게 지나간 붓질의 흔적을 그대로 남기는데요. 겹겹이 쌓인 물감과 선명한 색채는 멈춰 있는 화면 속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과 현장의 공기를 느끼게 합니다. 이로써 관객은 빠르게 지나가는 디지털 이미지와 달리 캔버스 위에 쌓인 물감의 질감과 붓자국을 천천히 바라보며 작품 속 풍경에 오래 머물게 되죠.
무더운 여름, 도심 속에서 피서지의 여유와 생동감을 느끼게 해줄 전시 <레스토피아 : restopia> 는 오는 9월 19일까지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로에 위치한 한솥 아트스페이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레스토피아>
공연 노인박멸
마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한국에는 여러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도 노인을 향한 혐오와 배제의 시선은 꾸준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돼 왔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노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신체의 노화로 움직임이 둔해지고 건강에 대한 걱정이 커지는 것 역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어쩌면 이는 표면적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늙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연극이 무대에 오릅니다.
연극 <노인박멸> 은 팔순을 앞둔 베테랑 택시기사 정복이 교통사고를 내면서 시작됩니다. 자식들은 사고를 이유로 이제 운전을 그만두라고 설득하지만 정복은 자신의 일을 쉽게 놓으려 하지 않는데요. 택시기사 정복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후 작품은 노인의 정년퇴직과 치매, 돌봄과 죽음의 문제로 확장되며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 어떤 위치로 밀려나는지를 들여다봅니다. 노인박멸>
작품은 우리 사회가 사람의 가치를 얼마나 ‘쓸모’와 ‘생산성’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일을 할 수 있을 때는 필요한 존재였던 사람이 노동에서 벗어나는 순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구분되는 과정 속에서 ‘유효한 인간’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잔인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노인박멸> 에서 ‘노인’은 특정 세대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치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늙음’을 밀어내는 이들에게 작품은 노인이 미래의 자신일 수 있다는 날카로운 사실을 건네는데요. 우리가 타인에게 보내는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향할 수도 있음을 직시하게 하죠. 결국 ‘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넘어 나이듦 역시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노인박멸>
‘노인’이라는 다루기 불편하고 어려운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우리 사회가 늙음과 인간의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을 되묻는 연극 <노인박멸> 은 오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노인박멸>
Copyright ⓒ 투데이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