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긴 비석 하나가 누워 있다. 백비(白碑)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 아래, 비석은 일어서지 못한 채 이름을 기다린다. 곁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글이 놓여 있다.
제주4·3은 폭동과 사태, 봉기와 항쟁, 사건과 학살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 사이에서 일흔여덟 해가 지나도록 온전한 이름을 얻지 못했다. 비석이 누워 있는 이유다.
이름을 얻지 못한 세월은 침묵의 세월이었다.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제주어 '속솜허라'가 등장한다. 숨을 죽이라는 말이다. 목소리를 내면 살아남기 어려웠던 시절, 침묵은 생존의 방법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반세기 동안 죽은 이의 이름조차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곳에서 기억은 일어서지 못하고 눕는다.
얼마 전 제주지역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제주4·3의 정명운동을 이야기했다. 백비에 이름을 새겨 바로 세우는 일은 단순히 사건의 명칭을 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말할 수 없었던 죽음을 말하고, 지워졌던 존재를 역사 안으로 불러들이며, 국가의 책임과 공동체의 상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를 시작하는 데도 이름을 바로 부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쪽이 오랫동안 '북한'이라고 불러온 상대의 공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스스로는 줄여서 '조선'이라고 부른다. 북쪽도 오랫동안 대한민국을 '남조선'이라고 불러왔다.
북한과 남조선은 단순한 지리적 표현이 아니다. 자신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국가이고 상대는 아직 수복하거나 해방해야 할 일부 지역이라는 분단체제의 언어다. 분단 80년 동안 남과 북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채 서로를 자기 체제 안의 불완전한 일부로 규정해 왔다. 이름을 지우며 존재를 부정했고, 존재를 부정하며 관계를 얼려 왔다.
최근 통일부가 상대의 공식 명칭을 불러주는 일을 평화공존의 첫걸음으로 제안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는 존중이 신뢰를 만들 수 있다며 국민의 의견을 듣고 공감대를 형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의 신중론이 뒤따랐다. 용어 하나가 정쟁의 빌미가 되어 오히려 나쁜 상황을 만들 수 있으니 잘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대통령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순간 통일을 포기했다거나 북의 두 국가론을 수용했다는 공격이 나올 수 있다. 북한 정권을 인정하고 핵과 인권 문제에 눈을 감았다는 색깔론도 뒤따를 것이다. 평화정책은 국민의 공감 없이 오래가기 어렵다. 표현 하나가 정책 전체를 삼켜버리는 정치 현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곱씹을수록 역설이 선명해진다. 이름 하나가 정쟁의 대상이 된다는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 바로 그 진단이 이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꺼내야 하는 이유다. 상대를 무엇이라 부르는가가 여전히 이념 검증의 리트머스로 작동하고,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사상을 의심받는 현실은 냉전이 제도가 아니라 사고방식으로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증거다.
신중함이 침묵의 다른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중은 시기와 방법을 고르는 일이고, 회피는 질문 자체를 미루는 일이다. 통일부가 제안한 것은 당장의 전면적인 시행이 아니라 공론화였다. 논란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면 분단체제의 언어는 바뀌지 않는다.
평화정책은 갈등이 없는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적대의 언어를 의심하고, 불편하더라도 새로운 관계의 말을 찾아가는 과정이 평화정책이다. 대통령의 역할은 논란을 피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왜 이 논의가 필요한지 설명하고 사회적 대화를 이끄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유엔총회 연설에서 상대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으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이 없다고 세계 앞에 천명했다. 체제를 존중한다면서 그 체제의 이름은 부르지 못한다면 그 존중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존중을 선언하는 일보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 어렵다면, 어려운 이유는 상대에게만 있지 않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분단의 두려움도 들여다봐야 한다.
제주4·3의 정명과 조선의 국호 사용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는 국가폭력의 진실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된 두 정치적 실체가 서로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다. 둘을 도덕적으로 같은 차원에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이름을 지움으로써 불편한 현실까지 지우려 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한 역사와 제대로 이름 부르지 못하는 관계는 모두 침묵과 부정 위에 놓여 있다.
조선이라고 부른다고 조선의 체제를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핵무장을 용인하거나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는 뜻도 아니다. 상대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한반도 북쪽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 실체를 그들이 사용하는 이름으로 호명하고 대화의 상대로 대하겠다는 뜻이다. 인정과 승인은 다르다. 호명과 동의도 다르다.
역사는 이미 답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1991년 남과 북은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같은 해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서명란에는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이라는 공식 국호를 나란히 적었다. 노태우 정부가 한 일이다.
상대의 공식 명칭을 사용하면서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통일 지향성을 함께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을 부른다고 헌법적 통일 지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지운다고 상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관계를 관리하려 하면 오판의 위험만 커진다.
상호성도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조선이라는 이름을 부른다면 조선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존중해야 한다.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일방적인 시혜나 굴종이 아니다. 서로를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관리해야 할 상대로 인정하자는 상호 규범이다. 승인 없는 인정, 수용 없는 관리, 적대 없는 공존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남북대화가 열리거나 군사적 긴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호 사용은 한반도 평화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모든 상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조건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북측이 당장 호응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상징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작지만 용기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비용과 신호의 비대칭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데는 막대한 예산도 복잡한 협상도 필요하지 않다. 상대의 호응을 기다리지 않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비용은 거의 들지 않지만 보내는 신호는 작지 않다.
우리의 언어에서 적대와 부정의 흔적을 걷어내고, 상대를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하고 협상해야 할 존재로 대하겠다는 신호다. 가장 값싼 조치가 가장 어려운 이유는 능력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상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정부가 하루아침에 모든 공문서와 일상 언어에서 북한이라는 표현을 없앨 필요는 없다. 외교와 남북관계 문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병기하고, 남북이 서로의 공식 국호를 사용하는 원칙을 제안할 수 있다. 북한, 북측, 조선이라는 표현이 놓인 역사적·법적 맥락을 국민과 함께 토론할 수도 있다. 통일부의 제안은 새로운 언어를 강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론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공론이 두렵다면 제주를 보면 된다. 애월읍 하귀리 주민과 출향민들은 3년여의 논의와 모금을 거쳐 2003년 영모원을 세웠다. 항일운동가를 모신 비, 호국영령을 기리는 비, 4·3 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나란히 세웠다. 그해 10월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나오기 다섯 달 전이었다.
하귀리 주민들은 서로 다른 죽음을 하나의 이름으로 합치지 않았다. 역사적 진실과 책임의 차이를 지우지도 않았다. 서로 다른 이름의 세 비석을 그대로 두고 함께 추모하며, 산 자들은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기로 했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겼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논쟁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논쟁을 감당해야 할 이유가 두려움보다 컸다. 화해는 서로의 기억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갈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하귀리 주민들은 평화공존이 무엇인지 과거 우리가 외쳤던 통일과는 다른 열린 통일이 무엇인지 국가보다 먼저 보여주었다.
제주4·3의 백비가 아직 누워 있다는 사실도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니 그대로 두자는 뜻은 아니다. 빈 비석은 언젠가 올바른 이름을 찾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약속이다. 정명은 합의가 완성된 뒤 시작하는 작업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고 서로 다른 기억을 마주하며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조선이라는 이름도 논쟁이 사라진 뒤 부르겠다고 하면 영원히 부르지 못할 수 있다. 이름을 부른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관계에서 평화를 세우기는 더 어렵다.
제주의 백비를 일으켜 세우는 용기와 상대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는 용기는 같은 일이 아니다. 두 용기가 향하는 방향은 다르지 않다. 지워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며, 침묵과 적대 위에 놓인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는 거대한 합의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서로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작은 용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 백비가 이름을 얻어 일어서는 날과 한반도 평화가 바로 서는 날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