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하우스 루프톱 광경.
흔히 ‘정원’이라고 하면 꽃과 식물로 아름답게 꾸민 소규모 실외 공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원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터가 된다면 어떨까? 그 상상을 실현한 ‘인문학 정원’이 경기도 양평에 자리 잡았다. 한국 토종 야생화인 메꽃이 만발한 골짜기라 하여 메덩골이라 불리던 곳에 조성된 정원의 이름은 ‘메덩골정원’. 6만 평 너른 땅에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옮기는 것을 넘어 인간 문명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철학을 투영했다. 동서양의 철학을 두루 포용하되, 전체를 관통하는 건 철학자 니체의 사상이다. 왜 하필 니체였을까? 그 답은 정원에 난 길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할 것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마치 책을 읽듯 건축물과 조경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동안 사유는 이어진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반드시 운동화를 착용할 것. 시간에 쫓겨 서두르다가는 많은 장면을 놓치기 십상이다.
1 한국정원의 남도돌담길. 2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선곡서원. 3 소나무가 자라난 원주암. 표면에 이끼가 무성하다. 4 선곡서원 내부의 통로. 5 재예당 앞에서 바라본 선비의 마당.
한국 철학의 풍경
메덩골정원은 크게 7000평 규모의 ‘한국정원’과 1만5000평에 달하는 ‘현대정원’으로 나뉜다. 그중 현대정원은 동서양 철학 사상을 소개한 ‘생각의 섬’과 한국의 역사적 국면을 시기순으로 나열한 ‘대한민국 이야기’로 이뤄진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에 다다르자 갈림길이 등장한다. 왼쪽은 2025년 9월 개관한 한국정원, 오른쪽은 2026년 6월 문을 연 현대정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졸졸 흐르는 물길을 따라 한국정원을 먼저 둘러보았다. 양반 계급의 담론이 펼쳐지리라는 짐작과 달리 ‘민초들의 삶’으로 여정이 시작됐다. ‘고향의 봄’이라 이름 붙인 길에는 동요 가사처럼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진달래가 객을 반긴다. 5월이면 꽃이 만발해 장관을 이룬다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실제 벼락 맞은 회화나무를 옮겨 심었다는 ‘서낭당 나무’와 영화 <서편제> 속 돌담길을 본뜬 ‘남도돌담길’,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본 빨래터를 지나자, 선비가 살았을 법한 가옥 두 채가 고샅(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그중 ‘파청헌’ 마루에 앉아 잠시 담 너머 경치를 감상했다. 집 옆의 작은 연못 ‘용반연’에서는 두꺼비를 닮은 ‘서성암’, 그리고 냇물에 서식하는 산천어를 볼 수 있었다. 이내 ‘재예당’ 마당에서 거대한 바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원주암’은 그 자체로 메덩골정원의 정신을 내포한 자연물이다. 바위에 뿌리 내려 굳건히 자라난 소나무가 니체의 ‘초인’을 연상시킨다.
가옥을 나와 오르막을 오르자 현대적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났다. 건축가 승효상이 안동 병산서원을 재해석한 ‘선곡서원’이다. 모던한 건물임에도 신기하게 병산서원의 모습이 겹친다. 특히 취병루의 기둥 구조는 전통 누각과 똑 닮았다. 그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크고 작은 바위가 학문을 배우는 유생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국적 사유란 풀 뿌리 민초에서 학문에 매진한 서생을 모두 아우르며 발전했다고 한국정원은 이르는 듯하다.
1 현대정원 ‘대한민국 이야기’ 중 ‘고난의 시대’. 척박한 환경의 막다른 길이 이어진다. 2 100개의 기둥이 설치된 플라톤의 ‘이데아’. 3 소설 <어린 왕자> 속 행성을 닮은 ‘여정’. 4 현대정원을 내려다보는 위버하우스.
5 니체의 영원회귀를 형상화한 ‘미로’. 6 거울로 이뤄진 싯다르타의 ‘깨달음’. 7 거북선 형태를 본뜬 ‘불굴의 정신’. 8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영감을 얻은 ‘자유’. 하늘을 향해 양팔 벌린 사람을 닮은 구조물이 서 있다. 9 선비의 갓을 표현한 ‘선비의 나라’.
사상의 뼈대를 닮은 건축
입구로 되돌아가 현대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국정원의 풍경이 한 마을처럼 연결된다면, 현대정원 ‘생각의 섬’은 동서양 철학이 건축물 형태로 독립적인 섬을 이룬다. 플라톤, 싯다르타, 소설 <어린 왕자>와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 구성 요소로, 칠레의 건축 스튜디오 페소 본 에릭사우센이 설계했다. 그중 정원 초입에 자리한 ‘이데아’는 100개의 스테인리스 기둥으로 플라톤의 이원론을 표현한 구조물이다. 피부로 인식하는 형이하학적 실체와 거울에 반사된 흐릿한 형상 사이에서 플라톤을 반박했던 니체의 이론을 떠올렸다. 붉은 대리석으로 <어린 왕자> 속 행성을 표현한 ‘여정’은 원형 콜로세움 형태다. 계단을 내려가 외계 행성을 탐사하듯 생경한 공간을 체험할 것을 권한다.
‘대한민국 이야기’는 조선시대를 의미하는 갓 모양 구조물, 거북선과 파도를 형상화한 ‘불굴의 정신’, 한국전쟁의 상흔을 막다른 길로 표현한 ‘고난의 시대’와 ‘피난길’, 그리고 ‘한강의 기적’과 ‘번영의 시대’로 이어지며 조선 초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나타낸다. 현대정원 두 행로의 끝이 만나는 지점에 초록빛 건물 위버하우스가 서 있다. 16개 기둥이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은 설명하지 않아도 니체의 초인 정신을 상징한다. 이처럼 위버하우스는 현대정원을 지탱하는 축이자 정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곳은 목적지가 아니다. 기착지이자 전환점이다. 산책로를 거닐며 저마다의 사유를 펼치면 그뿐, 이 정원은 특정 철학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상가의 이론과 우리 역사를 경유해 일상으로 귀환하는 동안 어떤 생각에 도달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반나절 남짓 메덩골정원을 둘러보았지만, 각 건물에 충분히 머무르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푸르름을 내뿜는 여름의 색채에 감탄하는 한편, 다른 계절 역시 궁금해졌다. 봄꽃과 가을 단풍, 겨울의 눈 덮인 정경을 담기 위해 다음을 기약한다. 어느 계절이건, 너른 정원은 언제든 사유의 틈을 열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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