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918년의 외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이를 구하라”는 절규는 한 세기를 건너 오늘의 무대에서 다른 언어로 되돌아온다. 구하는 대신 포기하는 선택, 낳지 않겠다는 선언, 먹히지 않기 위한 소극적 저항. 이 연극은 그 역설을 정면으로 끌어올린다.
연극 '식인일기'는 중국 현대사 대표 문호 루쉰의 문제의식을 빌려오되,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완전히 다시 쓴다. 광인은 더 이상 미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성실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 정상성의 과잉이야말로 오늘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작동한다.
무대 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실한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직업은 ‘사회적 약자’다. 역설적인 설정은 곧바로 관객을 불편한 웃음으로 끌어들인다. 약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과정이 곧 노동이 되는 시대, 이 작품은 그 기이한 윤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청년은 스스로를 지운다. 소득을 지우고, 가족을 지우고, 욕망을 지운다. 하나를 덜어낼 때마다 통과 가능성은 높아진다. 비워낼수록 유리해지는 구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해방이 아니라 탈락을 피하기 위한 전략에 가깝다.
다섯 개의 철문과 다섯 번의 심사. 이 반복 구조는 일종의 의식처럼 작동한다. 매번 통과를 위해 제출되는 것은 서류이지만, 실제로는 신체와 정체성의 일부다. 정육점 고리에 걸린 인생의 파편들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무대는 점점 더 서늘해진다.
'식인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웃음이다. 비극적 상황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낄낄거리게 만든다. 약자 배틀, 무주택 기념 파티, 가난을 연출하는 인테리어 같은 설정은 기괴할 만큼 현실적이다. 과장된 코미디의 외피는 오히려 현실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웃음은 방어를 무너뜨린다. 관객은 경계심을 내려놓은 채 상황을 소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웃음은 방향을 잃는다. 언제부터인가 웃고 있는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연출은 정육점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고리에 걸린 조각들, 점점 비어가는 몸, 대신 늘어나는 인형. 배우와 오브제가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시각적 언어는 설명보다 강력하다. 말로 전달되지 않는 감각이 관객의 몸에 직접 새겨진다.
하이브리드 인형의 사용은 작품의 또 다른 재미다. 인간과 닮았으나 완전히 같지 않은 형상은, 서류 속의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극을 상징한다. 인형은 점점 더 완벽한 대체물이 되어가고, 인간은 점점 더 희미해진다.
원작자 루쉰은 당대 사회의 병리를 ‘식인’이라는 은유로 드러냈다. 사람을 먹는 사회라는 설정은 당시에도 충격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훨씬 더 은근하게 작동한다. 직접적인 폭력 대신 제도와 기준, 평가와 서열이 사람을 잠식한다.
연극은 그 은유를 현재화한다. 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먼저 내어주는 행위, 그것을 합리적 선택으로 받아들이는 감각. 광기는 더 이상 바깥에 있지 않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누구나 수행하는 규범이 된다.
작품은 분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체제를 향한 직접적인 비판 대신, 개인의 행동을 따라가며 구조를 드러낸다. 관객은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된다.
막이 내려갈 즈음, 하나의 사실이 남는다. 무대 위에서 벌어진 일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장된 설정과 코미디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익숙함이 공포로 전환되는 순간, 작품의 칼날이 드러난다.
'식인일기'는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체험하게 만든다. 웃음으로 시작해 서늘한 감각으로 끝나는 이 여정은, 관객의 감정선을 교묘하게 조율한다. 감정의 낙차가 클수록, 남겨지는 여운은 길어진다.
결국 작품은 누군가가 어떻게 ‘고기’가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의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낸다.
루쉰의 문장은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살아난다. 다만 이번에는 활자가 아니라 몸과 웃음, 그리고 침묵으로 번역된다. 그 번역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시대의 변화가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의 집요함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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