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그룹 잔액 6.3조 줄어…지난해 5.6조 증가서 전환
AA- 3년물 118bp↑…상반기 발행액, 2022년 긴축 수준
은행 대출도 한도 소진 조짐…내년까지 66.7조 만기
(서울=연합뉴스) 정회인 기자 = 올해 들어 국내 10대 대기업 그룹의 회사채 발행 잔액이 삼성그룹을 제외하고 일제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권시장에서 높아진 조달금리에 은행권 대출 등으로 눈을 돌린 영향이 큰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지난해보다 잔액 증가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진 반면 SK그룹은 지난해 1조3천억원 넘게 늘었던 회사채 잔액이 올해 4조원 이상 줄어 발행 기조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5일 코스콤 CHECK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회사채 발행 잔액은 지난해 말 201조558억원에서 이날 194조7천821억원으로 6조2천737억원(3.1%) 감소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5조5천985억원(2.9%)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의 회사채 발행 잔액만 23조1천264억원으로 작년 말 19조2천577억원보다 20.1% 증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증가액이 1조8천800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 들어 잔액 확대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졌다.
회사채 발행 잔액이 늘었다는 것은 만기 상환 등으로 줄어든 규모보다 신규 발행이 더 많았다는 의미다. 만기가 도래해도 공모 회사채 시장에서 꾸준히 차환(신규 발행)이 이뤄질 수 있는 재무 체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주요 그룹 가운데 올해 순발행 기조를 보인 곳은 삼성그룹이 유일했다. SK를 비롯한 나머지 9개 그룹의 회사채 잔액은 모두 지난해보다 줄었다. 잔액 감소는 차환보다 상환액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계열사별로 보면 삼성카드[029780]의 잔액이 1년 새 2조3천786억원 늘어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지난해 발행이 없던 삼성에스디에스[018260]도 올해 1조2천200억원 잔액이 생겼고, 삼성증권[016360]과 삼성중공업[010140]도 각각 4천400억원, 2천250억원 증가하며 그룹 전체 잔액 확대를 이끌었다.
SK의 회사채 발행 잔액은 43조1천414억원에서 39조916억원으로 1년새 4조498억원 감소해 주요 그룹 가운데 감소 폭이 가장 컸다. 1년 전 같은 기간에는 잔액이 1조3천401억원 증가했지만, 올해는 대규모 순상환으로 돌아섰다.
SK하이닉스[000660]의 잔액이 지난해 4조4천600억원에서 올해 3조4천600억원으로 1조원 줄어 감소 폭이 가장 컸다. SK하이닉스는 올해 반도체 호황에 따른 실적 개선과 현금창출력 확대를 바탕으로 만기 도래 물량을 자체 자금으로 상환하는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SK엔무브는 지난해 9천억원이던 잔액이 모두 사라졌고, SK텔레콤[017670](-8천200억원), SK에너지(-4천700억원), SK지오센트릭(-3천700억원), 지주회사 SK(-3천650억원)도 감소했다.
이어 LG[003550](-1조3천711억원), HD현대[267250](-1조1천280억원), GS[078930](-9천550억원), 롯데(-9천136억원), 현대차[005380](-8천349억원), 포스코(-4천800억원), 신세계[004170](-3천350억원) 등의 순으로 잔액이 줄었다.
올해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이 줄어든 데에는 시장금리 급등으로 악화한 공모채 발행 여건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란 간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오르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다시 커지면서 지난 3월 AA-급 3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하루 만에 13.2bp(1bp=0.001%p) 뛰는 등 시장금리가 급등했다.
높아진 조달금리와 투자수요 부진 탓에 기업들이 공모채 발행을 미루거나 만기채를 자체 상환하고, 은행 대출 등 다른 조달 수단으로 눈을 돌린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작년 말 연 2.953%에서 7월 말 3.959%로 4% 턱밑까지 뛰었고, AA- 3년물 회사채 금리는 같은 기간 연 3.476%에서 4.653%까지 117.7bp 상승했다.
한 시중은행 기업금융 관계자는 "기업들이 회사채를 안 찍는 것이 아니라 못 찍는 경우가 많다"며 "회사채 조달비용이 은행 조달금리보다 훨씬 높은 데다, 최소 AA급이 아니면 주요 투자자들이 잘 담지 않아 발행 여건이 상당히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채 발행을 의뢰하는 기업은 많지만 원하는 조건으로 인수해 줄 주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일반회사채 발행액은 25조9천52억원으로 1년전 37조8천320억원보다 31.5% 감소했다.
이는 풍부한 유동성 환경이 막을 내리고 고강도 금리 인상이 본격화했던 2022년 상반기(21조8천25억원)와 근접한 수준이다.
특히 공장 신·증축이나 기계·설비 구입 등에 쓰이는 시설자금 목적 발행액이 지난해보다 11% 감소한 9천200억원에 그쳤다.
시설 목적 발행액은 2021년(5조4천788억원)부터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지만, 1조원 아래로 내려간 것은 사상 처음이다.
기업들이 시설투자를 줄인다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재무 부담을 낮출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생산성 향상과 신규 사업 발굴이 지연돼 미래 성장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반 회사채 발행이 10조원 넘게 줄어드는 사이 은행 대출은 2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올해 1분기 12조원, 2분기 13조5천억원 등 상반기에만 총 25조5천억원 증가해 지난해 연간 증가액(20조4천억원)을 이미 넘어섰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달 비금융업 204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최근 1년간 시장 여건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이 가장 많이 활용한 자금 조달 수단은 시중은행 차입으로, 응답 비중이 43.6%에 달했다. 회사채 발행을 활용했다는 응답은 19.6%였다.
그러나 하반기부터는 은행 대출 여건도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4대 시중은행을 포함해 상당수 은행이 올해 상반기 우량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업대출을 빠르게 늘리면서 연간 기업 대출 한도를 이미 상당 부분 소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은행은 신규 대기업 대출 취급을 사실상 마감하거나 심사를 강화하고 있으며, 은행채 금리 상승으로 대출금리까지 오르면서 기업들의 자금 조달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편 10대 그룹의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 말까지 회사채 만기 도래액은 총 66조7천198억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하반기 19조1천386억원, 내년 47조5천812억원이며 내년 1분기에만 17조9천404억원이 몰려 있다.
그룹별로는 현대차그룹이 21조7천596억원으로 가장 많고 SK(12조4천405억원), 삼성(8조1천800억원), 롯데(7조7천360억원) 순이다.
채권발행시장(DCM)업계 한 관계자는 "공모채와 은행 대출 여건이 동시에 빠듯해지는 상황에서 내년까지 대규모 만기가 몰려 있다"며 "기업들이 차환 발행과 은행 차입, 자체 상환을 어떻게 구성할지가 앞으로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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