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더위를 피해 냉방시설이 갖춰진 지하상가를 찾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역과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도 무더위를 피해 들어온 시민들로 북적였지만 정작 상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에어컨 앞에서 바람을 쐬거나 매장을 둘러본 뒤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부 상인들은 하루에 옷 한두 벌을 파는 데 그치거나 매출이 80% 가까이 줄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4일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38도까지 치솟자 시민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했다. 르데스크가 찾은 서울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는 바깥의 찜통더위가 무색할 만큼 시원했다. 상가 내부는 좁은 통로를 따라 양방향에서 밀려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류와 가방, 신발 등을 진열한 매장 앞에도 사람들이 수시로 멈춰 섰다. 겉으로만 보면 폭염 덕분에 지하상가가 때아닌 특수를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매장 안 풍경은 달랐다. 시민들은 진열된 옷을 집어 들고 가격을 확인하거나 매장 내부를 둘러본 뒤 빈손으로 돌아서기 일쑤였다. 상가를 오가는 유동인구는 끊이지 않았지만 계산대로 향하는 손님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의류매장 상인 김경진 씨(43·여)는 북적이는 통로 바로 옆에서 오가는 고객들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김 씨는 "3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 매출은 성수기보다 80% 가까이 줄어 고심이 깊다"며 "겉으로 보기엔 지하상가에 사람이 많아 보이지만 지갑을 여는 고객들이 크게 감소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영업 초창기만 해도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고객이 밀려들었는데 최근에는 옷 소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매출 적자가 누적되면서 폐업까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상인 최현주 씨(가명·여)도 "폭염이라고 해서 매출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더위를 식히기 위해 지하상가를 들르는 사람만 늘어났다"며 "실제 구매까지 하는 손님은 드물어 기대했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남역 지하상가의 분위기는 더욱 침체돼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시민들이 통로를 계속 오갔지만 상당수는 상점에 머물지 않고 저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위에 지친 시민들이 냉방기 앞에 멈춰 서 한동안 바람을 쐬는 모습과 달리 주변 매장 내부는 한산했다. 유동인구는 많았지만 지하상가에서 쇼핑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곳에서 가방을 판매하는 김미성 씨(55·여)는 상권 침체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고속터미널에서 10년여간 의류 장사를 하다가 강남역으로 자리를 옮긴 지 4개월 만에 김 씨는 두 상권의 차이를 직접 체감하고 있었다. 김 씨는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유동인구 자체가 있지만 최근 강남역 지하상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나가는 통로처럼 변했다"며 "이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상가에 들어와 상품을 둘러보는 경우조차 드물다"고 밝혔다. 이어 "가방 매출도 예상했던 것의 절반에 그치고 있어 걱정이 크다"고 설명했다.
여성 의류를 판매하는 또 다른 상인의 반응은 더욱 비관적이었다. 이영미 씨(가명·67·여)는 하루에 옷 두 벌을 팔기도 어렵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씨는 "올해는 코로나19 시기보다 더욱 장사가 안된다"며 "예전에는 단골손님이라도 꾸준히 찾아왔는데 이제는 옛말이 됐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자영업자들은 폭염으로 지하상가를 찾는 유동인구는 늘었지만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입을 모았다. 더위를 피해 상가로 들어와 냉방기 앞에서 바람을 쐬거나 매장을 구경하는 시민은 많아졌지만 정작 지갑을 여는 소비자는 찾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특히 의류·가방 등 패션업종 상인들은 소비심리 위축까지 겹치면서 매출이 예년보다 크게 감소해 상가의 혼잡도와 실제 매출 사이의 괴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한 의류 구매가 보편화된 점도 오프라인 상권의 어려움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가데이터처 온라인쇼핑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의복 거래액은 16조9354억원을 기록했으며, 이 가운데 모바일쇼핑이 차지하는 비중은 73.9%에 달했다.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직접 찾지 않고도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의류를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 자리 잡은 셈이다.
현장에서도 이러한 소비 행태를 엿볼 수 있다. 고속터미널과 강남역 지하상가 모두 20·30대 젊은 층의 발길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직접 상품을 구매하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강남역에서는 젊은 층 상당수가 상가를 쇼핑 공간으로 이용하기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한 통로나 더위를 식히는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문가들은 폭염으로 냉방이 잘되는 공간을 찾는 소비자가 늘더라도 이러한 유동인구가 실제 구매로 연결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소비 여력 감소와 온라인 쇼핑 확산까지 맞물리면서 오프라인 의류매장의 어려움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유동인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매출로 연결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며 "소비자들이 지하상가를 찾는 목적이 더위를 피하는 데 있다면 실제 구매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젊은 소비자층의 의류·패션 지출은 이미 상당히 낮아진 데다 온라인 쇼핑으로의 전환도 빨라지고 있다"며 "앞으로 오프라인 소비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면 자영업자들이 겪을 어려움은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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