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노규민 기자] 과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주로 순종적인 아내, 희생하는 어머니, 누군가에게 구출 받는 존재였다. 1990년대 이후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형사, 변호사, 킬러, 정치인, CEO 등 캐릭터가 확장 되면서 여성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담겼고, 그들은 극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다양한 장르에 등장하는 '악녀'는 기존에 주를 이룬 포악하고 거침없는 남성 빌런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서사를 이끌며 극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집행위원장 황혜림)는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온 '악녀'의 계보를 동시대적으로 다시 읽는 특별전 '미치거나 나쁘거나: 악녀의 사회학'을 선보인다.
이번 특별전은 신화와 고전의 원형적 여성 인물부터 누아르·스릴러·호러 장르 캐릭터까지, '악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주돼왔는지 살펴본다. 마녀, 나쁜 엄마, 미친 여자, 팜므파탈, 못생긴 여자, 비호감 여자 등 여성에게 붙여온 이름을 따라 욕망과 권력, 모성, 몸과 미를 둘러싼 규범의 변화를 짚는다.
1969년부터 2026년까지 제작된 총 8편을 통해 시대와 장르에 따라 달라진 ‘악녀’의 유형과 의미를 살펴본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메데아'(1969)는 배신당한 아내이자 이방인, 복수하는 여성이며 자식을 살해한 '괴물 같은 어머니'로 반복해 소환돼온 메데아를 그린다. 알리스 디옵의 '생토메르'(2022)는 메데아의 오래된 서사를 현대의 법정으로 옮겨, 모성의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을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하는지를 묻는다. '생토메르'는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인 은사자상, 데뷔작상인 '미래의 사자상'을 수상했다.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의 여자'(1974)에서 메이블은 아내와 어머니에게 요구되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미친 여자'로 규정된다. 영화는 메이블의 불안을 개인의 병리로 환원하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누가 정하는지 질문한다.
202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울리케 오팅거의 '블러드 카운테스'(2026)는 피와 젊음을 탐하는 흡혈귀로, 악명 높은 바토리 백작부인을 욕망을 숨기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는 '역사적 악녀'로 다시 바라본다.
카를로스 사우라의 '카르멘'(1983)은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따르며 누구에게도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여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플라멩코 공연을 만들어가는 남성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자유로운 여성이 남성의 욕망과 환상 속에서 팜므파탈이나 '위험한 여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는 범죄를 통해 만난 두 여성이 갈등을 넘어 연대와 생존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여성 버디 누아르다. 남성 중심의 한국 범죄영화에서 주변부에 놓였던 여성들을 서사의 중심에 배치하고, '위험한 여자'의 이미지를 새롭게 쓴다.
여성의 몸과 아름다움을 둘러싼 규범도 이번 특별전의 중요한 축이다. 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어글리 시스터'(2025)는 신데렐라의 의붓자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못생긴 여자'라는 낙인과 여성에게 요구되는 미의 기준을 바디 호러의 언어로 해체한다. 또한 계모와 의붓자매가 가부장적 가족 서사에서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악역으로 그려져온 방식을 되짚는다.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2008)는 통상적인 미의 기준과 친절함의 규범에서 벗어난 질투와 집착,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양미숙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여성에게 요구돼온 호감과 매력, 적절한 감정 표현의 규범을 비틀며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독자적인 '비호감 여성' 캐릭터를 완성한다.
이처럼 8편의 작품은 모성, 욕망과 권력, 몸과 감정의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이 어떻게 '나쁜 여자'로 명명돼왔는지를 되짚고, 오늘날 이들이 자신의 욕망과 선택으로 서사를 이끄는 주체로 다시 쓰이는 변화를 보여준다.
황혜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악녀는 여성의 분노와 욕망, 권력과 자유, 모성과 몸을 설명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만들어온 문화적 이름일 수 있다"며 "왜 어떤 여성을 '미치거나 나쁜 여자'라고 부르는지, 그 이름을 오늘날 어떻게 다시 쓸 수 있는지를 작품들과 함께 묻고자 한다"고 밝혔다.
28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오는 20일부터 26일까지 총 7일간 메가박스 신촌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다.
뉴스컬처 노규민 pressgm@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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