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반도체의 두뇌와 전기의 심장이 결정할 미래 권력
역사는 언제나 가장 부족한 자원을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해 왔다. 석기시대가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듯, 현대 문명을 지배해 온 석유 시대 역시 석유의 고갈로 막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명을 움직이는 새로운 병목이 등장할 때 패권은 조용히 이동한다. 19세기 석탄이 ‘팍스 브리타니카(영국의 평화)’를 열었고 20세기 석유가 달러와 결합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완성했다면, 이제 인공지능(AI)과 초연결을 축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에너지 패권을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석유국가(Petro-state)의 시대가 저물고, 사회 전체를 AI 플랫폼으로 작동시키는 전기국가(Electro-state)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칩과 전기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짓는 오늘날, 전력은 단순한 공공재를 넘어 국가 안보이자 거대한 지정학적 무기로 부상했다.
100년의 석유 패권 저물고, 정보의 매체 ‘전기’가 지배하다
19세기 중반, 전 세계 석탄의 3분의 2를 캐내며 증기기관을 돌렸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최초의 상업용 유정이 뚫린 이래 세계는 석유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결정적인 변곡점은 1974년 구축된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이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모든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도록 합의하면서, 달러는 영구적인 수요를 보장받았다. 석유가 달러를 만들고, 달러가 군사력을 구축하며, 군사력이 다시 석유 공급로를 지키는 견고한 순환 고리. 이것이 지난 100년간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탱해 온 숨겨진 기둥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에너지 전환기를 맞은 지금, 패권의 무게추는 석유에서 전기로 이동하고 있다. 이 전환은 앞선 두 번의 에너지 혁명과 완전히 다른 특징을 지닌다. 전기는 동력을 제공하는 에너지를 넘어, 흐르면서 데이터를 생산하는 정보의 매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작동이 전기 신호로 번역되는 세계에서 소프트웨어는 신호를 읽고 분석하며, 예측하고 제어한다. 전기차를 이른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기가 에너지로서 자동차를 움직임과 동시에 데이터의 매체로서 인공지능(AI)에 세계를 보여주며 자율주행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도로 위의 차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기가 닿는 모든 곳이 지능화된다. 공장이 전기화되면 다크팩토리(Dark Factory)가 되고, 농장이 전기화되면 스마트팜이 된다. 전력망 자체가 지능을 요구하는 시대, 일렉트로스테이트(전기국가)는 단순히 전기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를 넘어 사회 전체를 AI가 작동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AI의 치명적 병목, 전력 폭식과 ‘일렉트로 위안’의 도전
AI 산업의 병목은 그동안 빠른 속도로 진화해 왔다. 초기 CPU에서 GPU로, 다시 고대역폭메모리(HBM)로 옮겨갔던 하드웨어의 한계는 이제 산업 생태계 밖의 거대한 인프라, 바로 ‘전력’을 정조준하고 있다. 앤트로픽의 수장 다리오 아모데이가 ‘천재들의 국가’라 극찬한 AI 데이터센터(AIDC)는 역설적이게도 사상 초유의 전력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미국에서 지어지는 초대형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소 국가의 연간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2030년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한국 전체의 연간 발전량(약 595TWh)에 육박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까지 나온다. 반도체 생산 현장 역시 막대한 전기를 쏟아부어야 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이 한 해 지출하는 전기요금만 약 5조 원에 달할 만큼, 전력은 곧 제조 경쟁력의 척도가 되었다. AI의 두뇌는 반도체이고, 그 심장은 전기인 셈이다. 심장이 멈추면 아무리 뛰어난 두뇌라도 한 줄의 추론조차 이어갈 수 없는 법이다.
전기국가로의 이행을 가장 치밀하게 준비하며 미국에 도전장을 내민 곳은 중국이다. 기존 석유국가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새로운 패권국이 될 수 없음을 간파한 중국은, 석유 중심의 체제를 건너뛰어(Bypass) 단숨에 전기국가로 도약하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위안화나 각국 통화를 활용한 에너지 결제를 시도하며 달러 패권의 틈새를 공략 중이다. 장기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추가 전기화로 완전히 이동했을 때, 기축통화 자리를 노리는 중국의 이른바 ‘일렉트로 위안(Electro-Yuan)’은 페트로달러 체제에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도전자가 될 것이다.
4,755조 원 메가프로젝트와 한국의 ‘에너지 대전환’ 생존 전략
글로벌 패권 경쟁의 룰이 바뀌는 가운데, 서방 진영의 핵심 제조창인 대한민국 역시 전기국가로 진입하기 위한 본격적인 출사표를 던졌다.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건립을 아우르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4,755조 원 메가프로젝트가 그 포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와 제조 기반, 유연한 소프트웨어 역량을 갖춘 한국이 AI 패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국가적 명운을 건 셈이다.
정부 차원의 에너지 안보 전략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7월 강원도 용평리조트에서 열린 대한전기학회 하계학술대회에서 기후에너지환경부 이원주 에너지전환정책실장은 “AI 시대에는 칩과 전기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며 ‘전기국가’ 전략을 핵심 비전으로 제시했다.
핵심은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로운 전원 믹스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00GW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간척지 대규모 태양광, 해상풍력 등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나아가 안정적인 기저 전력 확보를 위해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은 물론, 2035년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를 목표로 표준설계 인가와 제조 기술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더불어 단방향 송전망을 에너지저장장치(ESS)와 고압직류송전(HVDC)을 활용한 분산형·양방향 전력망으로 혁신하고, 지역별 전력 자급률을 반영한 지역별 전기요금제를 연내 도입해 수요 분산을 유도하겠다는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내놓았다.
최후의 뇌관 ‘전력망’, 사회적 합의가 미래를 결정한다
그러나 발전소를 짓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전기국가가 될 수 없다.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망이 없다면 거대한 발전소도 결국 고립된 ‘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기는 석유처럼 저장해 둘 수 없으며 생산과 소비가 찰나의 순간에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균형이 무너지면 대규모 블랙아웃이라는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진다.
현재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전력망을 이웃 국가와 연결할 수 없는 완벽한 ‘전력의 섬’이다. 게다가 발전 시설은 동해안과 남해안에 집중된 반면, 전력 폭식이 일어나는 데이터센터와 첨단 산업단지는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다. 동해안 지역에서 수년째 이어지는 송전선로 갈등은 에너지 정책이 기술의 문제인 동시에 치열한 사회적 합의의 영역임을 시사한다. 반도체 공장과 달리 송전탑과 변전소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긴 건설 기간, 무엇보다 주민 수용성이라는 높고 험난한 허들을 넘어야만 한다.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는 이 병목을 풀지 못한다면, 4,755조 원 규모의 장밋빛 미래도 모래성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위기 속에는 기회가 숨어 있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이 치열한 전력 확보 전쟁에 돌입한 가운데, 세계 각국은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인프라 파트너를 찾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 기술과 SMR 기술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압기, 발전기, 초고압 케이블 등 전력 인프라 산업 전반에 걸쳐 압도적인 글로벌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배 위로 행군한다”고 했다. 오늘날의 AI 군단은 촘촘하게 짜인 전력망 위에서만 행군할 수 있다. 전기국가 시대의 최후 승자는 가장 혁신적인 알고리즘을 짜는 국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에너지 믹스를 바탕으로 전력을 무기화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사회 전체의 지능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만이 새로운 팍스(Pax)를 주도할 것이다. 더 이상 전기를 한낱 공공요금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패권은 이미 이 뜨거운 전력의 혈관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격렬하게 방향을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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