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훈 원장의 사례로 본 재택의료] 찾아가기 전엔 몰랐던 환자의 진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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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훈 원장의 사례로 본 재택의료] 찾아가기 전엔 몰랐던 환자의 진짜 삶

헬스경향 2026-08-01 22:45:34 신고

노동훈 원장(편한자리의원, ‘통합돌봄현장, 의사가 집으로 옵니다’ 저자) 
노동훈 원장(편한자리의원, ‘통합돌봄현장, 의사가 집으로 옵니다’ 저자) 

필자는 9년간 요양병원을 운영했고 지금은 의원으로 전환해 외래와 방문진료를 한다. 그동안 많은 환자를 만났다. 진료실에서 청진기를 대고, 혈압을 재고, 모니터 속 혈액검사 수치를 확인하며 약을 처방했다. 차트 위 숫자가 안정권에 들어서면 치료가 잘 되고 있구나 안도하곤 했다. 적어도 환자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그들의 진짜 삶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20년 이상 의사 생활을 했지만, 방문진료를 시작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진료실 안에서 의사가 아는 환자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병원 문을 나선 환자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상을 견디며 약을 먹고 생활하고 있는지 차트는 말해주지 않는다.

경기도 양주의 80대 어르신 집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만성질환으로 수년째 약을 복용 중인 분인데, 이상하게 약효가 들쭉날쭉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원인을 찾으려고 거실 식탁 쪽을 둘러본 순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영양제와 과거에 처방받은 약, 다른 병원에서 받은 약, 심지어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어느 게 무슨 약인지 몰라 보이는 대로 먹었다고 한다. 진료실에서 처방전을 줘도, 환자의 집에서 그저 혼란스러운 약 더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실제로 만성질환자는 한 보따리의 약을 받아간다.

또 다른 어르신의 집에서는 문턱이 눈에 들어왔다. 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길목에 있는 3cm 높이의 나무 문턱. 건강한 사람은 있는지도 모를 그 낮은 턱이, 다리 근력이 떨어진 어르신에게는 넘을 수 없는 산맥과 같다.

수차례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심지어 골절까지 경험한 후 넘어질까 두려워 침대 위에서만 지냈다. 결국 근육은 빠지고 관절은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어르신, 운동 좀 하셔야 합니다”라고 했던 한마디가 현장에서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느낀 순간이었다.

흔히 말하는 사회적 입원이나 만성질환자의 갑작스러운 악화는 이런 작은 균열에서 시작된다. 제때 먹지 못한 약, 주거환경의 낙상 위험,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쌓여 응급실행으로 이어진다. 병의 악화라 하지만 현장에서 본 원인은 삶의 균열이었다.

방문진료는 단순히 의사가 가방을 들고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다. 환자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 즉 삶의 맥락을 살피는 일이다. 환자의 방에 들어서면 습관이 보이고, 주거 환경이 보이고, 돌봄에 지친 보호자가 보인다. 질병 뒤에 숨겨진 '사람'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료는 사람이 병원을 찾아오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병원에 올 수조차 없는 취약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갈 때 완성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짧은 발걸음이 한 사람의 존엄한 일상을 지켜내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과 의료 재정의 낭비를 막는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오늘도 가방을 챙겨 들고 누군가의 집 문 앞에 선다.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차트 뒤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문을 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하지만 의사로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삶의 진실들이 그곳에 있다.

<글 노동훈 원장(편한자리의원, ‘통합돌봄현장, 의사가 집으로 옵니다’ 저자)ㅣ정리 헬스경향 장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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