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제품이 아니라 경영 방식과 조직문화, 의사결정 시스템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혁의 본질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는 데 있다는 메시지였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금융이 택한 방식은 그와 정반대다. 구조를 손보기보다 사람의 임기를 먼저 법으로 제한하려 한다.
이재명 정부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금융지주 내부의 폐쇄적인 이너서클과 장기 집권 구조였다. 그 문제의식은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한 차례로 제한하는 금융회사지배구조법 개정 추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초임 3년에 연임 한 차례만 허용해 재임기간을 최대 6년으로 제한하고, 그 한 번의 연임도 주주총회 특별결의(3분의 2 이상 찬성)를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연임이 가능하며, 세 번째 임기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3연임 금지의 명분이 충분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민간 금융회사 최고경영자의 임기를 가이드라인을 넘어 법률로 직접 제한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장기 재임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모범규준이나 자율규범을 넘어 법으로 임기 상한을 정하는 것은 경영 자율성과 주주권을 함께 제약하는 조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제도의 타당성을 판단하려면 먼저 장기 재임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장기 재임 회장들이 어떤 성과를 냈고 어떤 한계를 남겼는지다.
금융지주 회장이 3연임한 사례는 손에 꼽힌다.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 김승유·김정태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윤종규 전 KB금융지주 회장, 그리고 현직 김기홍 JB금융지주 회장이 대표적이다.
라응찬 회장은 조흥은행과 LG카드 인수를 통해 신한금융을 리딩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임기 말 ‘신한사태’라는 경영진 내분 속에 퇴장했다. 3연임 반대론이 가장 먼저 거론하는 사례다.
반면 김승유·김정태 두 회장이 이끈 하나금융은 외환은행 인수와 통합이라는 대형 과제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했다. 김정태 회장은 2018년 3연임 이후 2021년 한 차례 더 연임했지만 임기는 1년에 그쳤다. 하나금융 내부 규범상 회장은 만 70세를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법이 아니라 이사회가 정한 내부 규범이 실질적인 견제장치로 작동한 사례다.
윤종규 전 KB금융 회장의 9년은 LIG손해보험, 현대증권, 푸르덴셜생명 인수라는 성과와 부코핀은행 부실, 홍콩 H지수 ELS 사태라는 부담을 함께 남겼다. 성과와 리스크가 한 재임 기간에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직 김기홍 JB금융지주 회장의 3연임 역시 법이 허용해서가 아니라 당시 당국이 제동을 걸지 않은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3연임 여부 자체가 성패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한사태는 장기 집권보다 견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였고, KB금융의 리스크 역시 임기와 무관하게 발생했다. 결국 핵심은 재임 기간이 아니라 견제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했는지 여부다.
실제 국내 금융지주 회장의 교체와 연임은 법률보다 시장과 이사회, 내부통제의 판단에 의해 결정돼 왔다.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은 라임펀드 사태 중징계 이후 연임을 접었고, 김정태 회장의 퇴임은 하나금융 내부 규범이 결정했다. 시장 평가와 내부통제, 이사회 판단이 이미 견제장치로 기능해온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존의 견제 장치 위에 또 하나의 법정 상한을 추가하려 한다.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은 최고경영자의 임기 자체보다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경영진을 평가하고 주주가 그 결과를 최종 판단하는 지배구조를 중요하게 본다. 해외 의결권 자문사들도 이사회의 독립성과 주주권을 중시하는 만큼 최고경영자의 임기를 법률로 획일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은 시장 친화적 지배구조와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임기의 일률적 제한은 이사회의 재량을 좁히고, 디지털 전환이나 대형 인수합병처럼 장기간 이어지는 경영 전략의 연속성을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정부가 법으로 최고경영자의 재임 한계를 미리 정하는 순간 시장은 기업보다 정책을 먼저 읽는다. 밸류업 정책으로 어렵게 쌓아 올린 시장 신뢰를 같은 정부가 지배구조 개입으로 흔든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다시 확대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적용 범위의 형평성도 문제다. 은행계 금융지주만 규제하면서 한국투자금융지주 같은 비은행 금융그룹은 제외된다.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장에게도 같은 재임 제한은 적용되지 않는다.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 국책은행에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일관성을 갖기 어렵다.
장기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사람을 바꾸기 위해 제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독립이사 중심으로 재편하고, 일정 지분 이상 주주에게 후보 추천권을 부여하며, 연임 단계마다 의결 요건을 강화하면 된다. 이는 정부가 최고경영자의 임기를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대신 시장과 이사회, 주주가 견제와 평가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시장 원리와 주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견제가 가능하다. 정부가 손봐야 할 것은 회장의 임기가 아니라 이사회의 독립성과 주주의 권한이다.
30여 년 전 이건희 회장이 강조했던 것은 세계 수준의 시스템이었다. 오늘 한국 금융이 돌아봐야 할 것도 사람보다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사람만 바꾸는 개혁은 오래가지 못한다.
금융시장은 임기를 법으로 정하는 나라보다 견제와 균형이 실제로 작동하는 나라를 신뢰한다. K-금융을 3류로 만드는 것은 3연임 자체가 아니다. 시장보다 법을 앞세우는 지배구조, 사람보다 시스템을 외면하는 개혁이다.
김의석 한국금융신문 기자 eskim@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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