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내림 칼럼] 느린 기록 이야기: 공책에 이어
[문화매거진=벼내림 작가] 독일 여행 이야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장은 필름이다. 짐을 챙기는 것보다 어떤 필름을 들고 갈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잿빛 도시에 어울릴 것 같은 저채도 색감이 특징인 ‘메트로 폴리스(LOMOCHROME METROPOLIS 100-400)’ 필름, 애정하는 ‘켄트미어(KENTMERE PAN 400)’ 흑백 필름, 도시 이름이 새겨진 ‘베를린 키노(BERLIN KINO 400)’ 흑백 필름을 소중히 담아갔다.
필름은 스캔 받기 전까지 어떤 사진이 나올지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세 개 중 ‘메트로폴리스’에 작은 모험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 필름만 특별히 ‘퍼포레이션 스캔’을 받았다. 일반 스캔은 이미지만 보이는 단조로움이 있다. 반면 퍼포레이션 스캔은 필름의 이미지뿐 아니라 가장자리의 필름 테두리까지 함께 스캔 된다. 필름 브랜드 이름이 함께 보이고, 아날로그 감성이 강해져 느낌이 한층 더 살아나는 장점이 있다. 가격도 일반 스캔보다 훨씬 비싸고, 모든 현상소가 퍼포레이션 스캔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업체를 찾는 것부터 쉽지 않다. 가능한 곳을 찾아도 장비가 정비 중이면 원해도 퍼포레이션 스캔을 할 수 없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아 스캔을 진행했고, 메트로 폴리스에 승부를 거는 선택은 옳았다.
1. 메트로 폴리스 필름
사진 위아래로 보이는 필름 테두리와 구멍은 퍼포레이션 스캔으로만 담을 수 있다. ‘LOMO’는 브랜드명, ‘METROPOLIS’는 필름 이름(종류), ‘21’은 21번째 촬영 컷을 의미한다. 핸드메이드 타일 가게에 가는 길 우연히 마주친 영화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리는 눈까지 포착이 잘 되어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다. 도시의 차분하고 정적인 공기까지 잘 담겼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메뉴판을 보는 사진.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눈사람같이 생긴 귀여운 모습에 선택한 아이스크림. 냅킨에 그려진 콘 캐릭터가 귀여워 소중히 들고 한국으로 같이 귀가했다.
암펠만 가게 앞에 있는 큰 조형물. 암펠만 키링 가득 사 올 걸. 뒤늦게 구하려 검색해 봐도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아쉬움만 한가득이다.
2. 베를린 키노 필름
광장에서 본 재밌는 사람. 일단 저 풀숲 같은 수트를 어디서 구했으며, 하루에 저렇게 몇 시간을 활동하다 가는지 궁금하다.
이건 세계 공통인 것 같은데, 역시 어디를 가나 어린이 장난감 코너는 눈이 즐거운 것들 한가득이다. 특히 이곳은 가족 단위의 코스프레 옷도 팔아서 신기했다. 얼굴에 쓰는 가면도 종류가 엄청 다양했고, 어린이 줄 선물 사러 간 건데 되려 성인인 내가 많이 즐기고 왔다.
뢰머 광장에 있는 귀여운 건축물과 친절한 황금 아저씨.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는 경험이라 이색적이었다. 검도 쥐여주시고, 왕관도 씌워주셨다. 단독으로 사진을 찍을 땐 손끝 각을 멋지게 살려주셨다.
음식에 있어서는 뼛속까지 한국인 인지라 한국에서보다도 한식을 더 자주 먹으러 다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식당 ‘김치 공주’. 가게 앞이 온통 붉은 조명이라 개성 있었다. 죄다 빨간 음식만 시켰는데도 고춧가루를 별도로 더 요청해서 싹싹 긁어먹었다.
지하철 안내 표시판. 괜히 멋져 보여 찍고 싶었다. 지하철을 뜻하는 U-Bahn 의 ‘U’와 그냥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이미지일 뿐인데, 앨범 표지 같았다. 토니안의 ‘유추프라카치아’ 같은 노래 앨범 커버로 잘 어울린다.
원하는 구도 그대로 잘 담겨 좋아하는 사진. 다리마다 자물쇠가 많이 걸어져 있었고, 뾰족하게 높이 솟은 성당의 풍경도 눈에 가득 담아두고 왔다.
3. 켄트미어 흑백 필름
독일 여행에 켄트 미어를 무조건 들고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꺼내 온 사진. 친구를 서울랜드 미러볼 앞에서 찍었던 순간이다. 빛이 이렇게 아름답게 담겼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거친 입자감도 살아 있다. 흑백 필름도 종류가 많지만 깨끗하고 부드러운 흑백보다 거칠고 낡아 보이고 불완전한 느낌을 주는 건 켄트 미어가 압도적이다.
집에 가기 전 보았던 마지막 야외 풍경. 자연에서 이렇게 오리를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필름 사진과 도시마다 하나씩 사 온 자석, 마셨던 맥주 병뚜껑을 모아와 만든 자석까지. 전부 차곡차곡 모아 나만의 작은 냉장고 전시장이 되었다. 추운 겨울에 다녀왔던 여행을 한여름이 다 되어서야 모두 이야기했다. 독일은 이제 글과 필름, 기념품 같은 다양한 형태로 곁에 머무르고 있다.
여행 전부터 조금씩 독일어 공부를 한 지 어느덧 282일째. 하리보 젤리에 언뜻 보이는 독일 국기, 킨더 초콜릿을 볼 때 킨더 뜻으로 ‘아이들’이 읽히는 것, 독일 보청기 간판 같은 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졌다. 그럴 때면 장난스레 “독일이 또 나를 부르네”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독일 이야기는 여기까지지만, 독일어 공부는 계속된다. 금방 독일이 또 나를 불러주길 바라면서. Deutschland, wir sehen uns wieder. (독일, 우리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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