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고법 가사1부(재판장 이상주)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재산분할금 944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확정 다음 날부터 완납일까지 연 5%의 지연이자가 붙는다. 2017년 7월 최 회장의 이혼조정 신청으로 시작된 공방이 9년 만에 종착점에 다가섰다.
만남에는 축사가 따랐고, 헤어짐에는 청구서가 남았다. 그리고 이 청구서에 적힌 것은 한 부부의 38년만이 아니다. 5 · 6공화국이 자녀들의 혼사로 그려 놓은 권력과 자본의 지도가, 한 세대를 건너 금액의 형태로 남아 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두 번의 혼례
1985년 6월,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전두환의 외동딸 전효선 씨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혼례를 올렸다. 신랑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윤상현 씨, 현재 5선의 국민의힘 의원이다. 주례는 권이혁 전 문교부 장관이 맡았다.
그로부터 3년 3개월 뒤인 1988년 9월, 같은 영빈관에서 또 한 번의 혼례가 열렸다.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첫해, 딸 노소영 씨와 최태원 씨의 결혼이었다. 재벌 총수의 장남과 대통령의 딸. 당대의 표현대로 '세기의 결혼'이었다.
한 장소에서 두 번, 신군부의 두 대통령이 자녀를 혼인시켰다. 권력은 총으로 쥐었으나, 그것을 사회의 상층부와 잇는 길은 언제나 혼사였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의 방향만 달랐다.
전두환의 혼맥은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차남 전재용 씨는 정권 말기에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의 넷째 딸과 결혼했고, 3남 전재만 씨는 이희상 동아원그룹 전 회장의 맏사위가 됐다. 장남 전재국 씨는 여동생의 여고 동창과 혼례를 치렀으니, 재계와의 결합과는 거리가 있었다. 국영 제철기업의 수장, 중견 식품자본, 그리고 평범한 연애.
반면 노태우가 맺은 혼맥은 단 한 건이었으나 재계 최상단으로 직행했다. 보통 사람을 표방한 정권이 남긴 가장 상징적인 정경 결합이 바로 그 혼례였다.
이별의 감정가 … 혼맥은 갱신되고, 남은 쪽이 대가를 치렀다
두 혼례의 뒷날은 극명하게 갈렸다. 전효선 씨와 윤 의원은 2005년 이혼했고, 두 딸을 뒀다. 윤 의원은 2010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딸 신경아 대선건설 상무와 재혼해 신격호 회장의 조카사위가 됐다. 대통령의 사위였던 자리가 재벌가의 사위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다.
개인의 선택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은 아니다. 다만 구조는 남는다. 권력으로 맺어진 혼맥은 그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다시 맺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킨 쪽에게는 뒷날의 셈이 남는다.
노 관장은 남았다. 38년을 버틴 끝에 손에 쥔 것이 9440억 원이다. 2022년 12월 1심의 665억 원이 2024년 5월 2심에서 1조3808억 원으로 스무 배 넘게 뛰었고,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쳐 이번에 9440억 원으로 좁혀졌다. 심급마다 요동친 이 액수 자체가 이별의 감정가가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웅변한다.
국민 다수가 이 판결에서 느낀 박탈감의 뿌리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되는 눈금과 저곳의 눈금이 전혀 다르다는 자각에 있었다.
노태우가 뿌린 씨앗 , 완납됐어도 지워지지 않은 업보
1995년 박계동 당시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수사에서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기업 총수 40여 명으로부터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확정했고, 그 추징금은 2013년 9월 동생의 대납으로 16년 만에 완납됐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그 완납조차 면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대법원은 노 전 대통령의 300억 원이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뇌물에서 나온 만큼 불법성과 반사회성이 현저해 노 관장의 기여로 참작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파기환송심 역시 "노태우 지원금 300억 원은 최 회장 보유 주식의 형성이나 가치 유지에 대한 노 관장의 기여, 재산분할비율 산정에서 참작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국고로 거둬들인 돈이 자녀의 권리로 되살아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딸이 자신의 몫을 입증하려 아버지의 비자금을 법정에서 스스로 꺼내야 했고, 사법부는 바로 그 카드를 불법이라는 이유로 되돌려 보냈다.
여기서 업보(業報)의 윤곽이 드러난다. 전두환은 환수를 거부해 자녀들에게 은닉 재산과 수사를 남겼고, 노태우는 빚을 다 갚았음에도 딸에게 '주장할 수 없는 기여'를 남겼다. 회피한 쪽에서도, 완납한 쪽에서도 업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을 발판으로 형성된 관계는 그 권력이 부정될 때 함께 부정되기 때문이다.
감정가를 매긴 것은 자본이었다
비자금이 빠지고, 혼인관계 파탄 전 최 회장이 경영권 유지 목적으로 친인척에게 증여한 주식까지 제외되면서 분할 대상 재산은 환송 전 2심 기준 약 4조115억 원에서 2조8300억 원으로 줄었다. 일부 보도가 인용한 '공동재산 약 4조 원'은 2심의 산정치이며, 이번 판결이 확정한 모수는 2조8300억 원이다.
그렇다면 최종 액수를 가른 변수는 무엇이었나. 재판부는 주식 가액의 산정 기준일을 항소심 변론 종결일인 2024년 4월 16일로 정했다. 당시 SK㈜ 주가는 16만 원대였고, 파기환송심 변론 종결일인 지난 6월 26일에는 81만5000원까지 올라 격차가 다섯 배를 넘었다.
재판부는 상승분에 최 회장의 경영적 기여가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면서도, 급등이라는 사정 자체는 분할비율 산정에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노 관장의 몫은 35%에서 33.3%로 조정됐다. 요컨대 마지막 액수를 가른 것은 혼인 기간도, 내조의 세월도 아니었다. 어느 날의 종가였다.
부담은 이제 지배구조로 옮겨 갔다. 재판부는 "최 회장의 보유 주식은 경영권 내지 지배권의 근거가 되는 측면이 있다"며 현물이 아닌 현금 지급을 명했다. 최 회장의 SK㈜ 지분 17.9%는 24일 종가 기준 8조 원을 넘고, SK㈜가 지난해 주당 배당금을 8000원으로 책정한 만큼 연간 1000억 원대 배당 수령도 가능하다.
담보대출과 배당, 비핵심 자산 처분을 섞은 복합 조달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며, SK실트론 매각을 포함한 그룹 리밸런싱 일정에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 회장 측은 판결문 검토 후 재상고 여부를 정하겠다는 입장이고, 노 관장 측은 침묵했다.
혼례를 앞둔 사람이 파탄의 지분율을 따지지는 않는다. 시작하는 자리에서 끝을 셈하는 일은 그 자체로 불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권력과 자본이 밀월을 시작할 때, 그 관계가 정산되는 날의 셈법을 미리 짚어 보는 이는 없다.
1980~90년대 권력의 중심에서 맺어진 관계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 재벌 지배구조와 재원 조달의 판도를 흔드는 변수로 표면화했다. 정치권력을 발판으로 얻은 성장은 당대에 회수되지 않을 뿐, 언젠가 법적 · 지배구조적 리스크라는 이자를 붙여 돌아온다.
관계의 시작을 결정하는 것은 감정이지만, 그 끝을 정리하는 것은 언제나 규칙이다. 개인에게 그렇고, 국가에도 그렇다. 영빈관의 두 혼례에서 서울고법의 판결문까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가 이번에 받아 든 문장은 하나다. 과거의 비공식 부채에도 반드시 만기가 있다.
[조자경 경제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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