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벚꽃이, 겨울에는 눈 내리는 호숫가의 풍경을 자랑하는 안산 화랑유원지에는 경기도를 대표하는 공공미술관 경기도미술관이 자리해있다. 도민의 일상을 지키며 때로는 치유의 공간으로, 때로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예술로 간직하며 시대 담론을 읽어낸 경기도미술관이 올해 스무살 생일을 맞았다. 3년 전 전승보 관장은 이곳에 부임하며 “누구를 위한 미술관이 될 것인가”를 질문으로 내세웠다. 광주·부산비엔날레와 수원·광주시립미술관 등 35년간 미술 현장을 두루 거쳤던 그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화려한 성과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 속에 자리잡았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줄곧 강조했다. 끝없이 형성되는 경기도의 정체성을 담아낼 ‘모두의 미술관’을 그려나가는 전 관장을 만나 경기도미술의 지난 발자취와 미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2023년 관장으로 부임 후 3년의 시간 동안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궁금하다.
A. 경기도미술관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지역의 아픔을 함께했고, 공간을 다시 정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까지 겪었다. 사실상 10년 가까이 어려운 시간이 이어진 셈이다. 부임 뒤에는 제한된 예산과 인력 속에서 미술관을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리는 데 힘썼다. 규모나 자원으로 다른 광역미술관과 똑같이 경쟁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다른 기관이 쉽게 주목하지 않지만 우리 미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영역을 재발견하는 ‘틈새 전략’을 택했다. 민화와 K팝아트를 접목한 ‘알고보면 반할 세계’, ‘한국현대목판화 70년: 판을 뒤집다’ 등이 대표적이다. 관람객들이 ‘볼 것이 많아졌다’, ‘전시가 재미있어졌다’고 말씀하실 때 회복을 체감한다. 시설도 안전과 장애인 접근성을 우선으로 점검해 연차별 보수 로드맵을 만들었다. 책임감은 결국 주인의식에서 나온다. 관장은 직접 선수가 되기보다 직원들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Q. 개관 20주년의 의미를 짚는다면.
A. 20년을 숫자로만 끊어 기념하기는 어렵다.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19를 거치며 공백과 회복을 반복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기도를 대표하는 공공미술관으로서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고 사회의 아픔을 시민들과 함께 기억해온 점은 중요한 자산이다. 코로나19의 긴 공백을 보낸 후 2023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사계’를 기점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관람객도 2023년 15만명, 2024년 12만여명에서 지난해 22만명을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에도 전년 동기보다 16% 이상 늘었다. 다만 숫자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니다. 한 번 방문한 사람이 좋은 경험을 간직하고 다시 찾는 공간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번 20주년도 성과를 자축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미뤄온 과제를 해결하며 다음 2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핵심 의제를 ‘환대와 연대’로 정했다. 누구나 편안하게 들어오고, 예술을 통해 사람과 지역이 연결되는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Q. 경기도미술관이 담아야 할 경기도의 정체성은.
A. 경기도의 정체성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만 머무르기보다 현재의 변화 속에서 계속 형성돼야 한다. 경기도는 지난 수십년간 산업화와 인구 증가를 가장 역동적으로 겪었고, 이제는 전국 각지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지역이 됐다. 급속한 성장의 혜택과 그 과정에서 생긴 사회적 문제, 기억도 함께 축적돼 있다.
따라서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나 오래된 전통만으로 경기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지역과 세대, 문화가 만나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경기도의 정체성이다. 경기도미술관은 예술과 일상, 작가와 시민,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며 그 형성 과정을 담아내야 한다. 특히 100여개 국적의 주민이 살아가는 안산의 장소성을 품은 ‘연결하는 미술관’, ‘모두의 미술관’이 돼야 한다.
Q. 올 초 20주년 소장품전을 거쳐 지난 16일 대규모 청년작가전 ‘우리의 여름에게’가 개막했다. 청년작가 26개팀을 조명한 이유는.
A. 국공립미술관에서 청년작가전을 정기적으로 이어가는 사례는 많지 않다. 경기도미술관에서는 3년 전부터 청년작가전을 체계화하자는 논의를 이어왔다. 앞으로 약 3년마다 경기지역 작가를 과반수 이상 포함한 청년작가전을 열고 싶다.
청년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작품을 한 번 걸어보는 기회만이 아니다. 자유롭게 실험하고 공공미술관의 체계 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할 환경이 필요하다. 청년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은 개인의 성장을 돕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동시대 시각문화의 첨단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오고 시민과 미술관의 문화 역량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다. 앞선 세대가 이끌고 다가올 세대가 밀어주는 선순환도 필요하다. 이번 전시의 ‘여름’은 청년의 오늘이자 성장과 가능성의 시간이다.
Q. 최근 인공지능(AI) 기반 미술 도슨트를 새롭게 도입했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과 어떻게 연결되나.
A. AI는 목적이 아니라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도구다. 이번 서비스는 30개 언어 번역과 ‘쉬운 글 해설’을 지원해 외국인과 다문화가정, 어린이, 고령층, 미술을 처음 접하는 관람객도 자신의 방식과 속도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AI가 큐레이터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미술관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안으로 초대해야 한다.
미술은 일부 애호가만을 위한 사치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공의 자산이다. 미술관도 의료기관이나 도서관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 영역이다. ‘모두를 위한 미술관’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경험을 주는 곳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예술과 만날 수 있도록 여러 길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Q. 안팎에서 뮤지엄 분리 독립과 운영 구조 개편이 논의되고 있다.
A. 뮤지엄 분리 독립은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 전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추진 방식과 우선순위, 시기별 계획을 담은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이 필요하다.
미술관은 단기간의 성과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기관이다. 소장품을 축적하고 연구를 이어가며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지역사회와 신뢰를 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하고 기획하면서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는 운영 구조가 핵심이다.
경기도의 인구와 규모에 비해 현재 미술관의 시설과 예산도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본관의 안전과 접근성을 높이는 보수·확충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문화 기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기 북부권의 공공미술관 인프라도 검토해야 한다.
Q. 앞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은 경기도미술관의 모습이 있다면.
A. 개별 전시의 성공을 넘어 연구와 교육, 지역사회, 국제교류가 연결되는 문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올 하반기에는 안산과 경기도의 다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현대미술전 ‘사랑노동아시아하기’를 선보인다. 지역에 뿌리를 두면서도 아시아와 세계의 동시대 미술을 잇고, ‘그 전시를 보기 위해 경기도미술관에 가자’는 말이 나올 만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화랑유원지에 자리한 것도 큰 자산이다. 전시만 보고 떠나는 곳이 아니라 공원을 산책하고 하루를 보내며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작품을 모두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작품 앞에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도민들이 산책하듯 찾아와 위로받고 다시 힘을 얻는,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문화공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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