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발판으로 미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대폭 확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압박에 대응하는 동시에 첨단 기술과 현지 생산 역량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23일(현지 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한국 기업의 대미 해외직접투자(FDI)는 102억 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규모로, 약 5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연간 대미 투자액도 전년보다 약 13% 증가한 252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현지 생산시설과 기술기업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미국 내 생산 기반을 확대해 관세와 공급망 위험을 낮추는 한편, 미중 갈등으로 중국 기업의 미국 자산 인수가 제한된 틈을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 미국과 유럽의 주요 자산을 공격적으로 사들였던 중국 기업이 인수 경쟁에서 사실상 빠지면서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는 것이다.
투자 확대의 중심에는 AI 반도체 호황의 수혜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두 기업은 견조한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반도체 생산시설뿐만 아니라 AI 칩, 데이터센터, 냉각 기술, 고속 데이터 전송 등 AI 생태계 전반으로 투자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삼성은 최근 AI 데이터센터 냉각 솔루션 기업 주타코어(ZutaCore)의 지분을 인수했으며, 지난해에는 AI 반도체 기업 그록(Groq)에 투자했다. 프랑스 AI 스타트업 미스트랄(Mistral)에 대한 대규모 투자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월 100억 달러를 출자해 미국 현지에 AI 투자 전문회사를 출범시켰다. 지난해에는 광통신 기반 데이터 전송 기술을 개발하는 미국 스타트업 아비세나(Avicena)에 전략적 투자를 단행했다.
수실 바티자 골드만삭스 아시아 인수합병(M&A) 총괄은 “AI가 전 세계 M&A 시장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며 “미국이 세계 혁신의 중심이라면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 기업은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AI 공급망 전반에서 적합한 투자 대상을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미중 갈등도 한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촉진하는 요인이다. 장태원 JP모건 북아시아 M&A 공동총괄은 “중국 기업들은 수년 전만 해도 서구 자산을 적극적으로 인수했지만, 미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주요 미국 자산을 사들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 M&A의 황금기를 맞고 있다”며 “안정적인 현금 흐름과 공급망 리쇼어링 필요성, 미국 시장 접근성 확보가 맞물린 결과”라고 말했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와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며 주요 대미 투자국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최근에는 투자 대상이 조선과 로봇, 생명공학 등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지정학적 위험을 줄이고 미국 정부의 산업 육성 정책과 방산·첨단 제조 수요를 선점하려는 움직임이다.
시장에서는 AI 산업을 중심으로 한국 기업의 수익성과 투자 여력이 더욱 커지면서 올해 하반기 대미 M&A와 전략적 지분투자가 한층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데이비드 심 삼일PwC M&A 파트너는 국내 성장세 둔화도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자극하고 있다며 “한국 상위 30대 기업 대부분이 북미 지역의 인수 대상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AI 호황으로 확보한 자금력과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맞물리면서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는 단순한 생산시설 확충을 넘어 첨단 기술과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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