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가져간 '목민심서'는 받았지만 석굴암 오층석탑 행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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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가져간 '목민심서'는 받았지만 석굴암 오층석탑 행방은…

프레시안 2026-07-25 15:39: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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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측, 석굴암 오층석탑 언급

제6차 회담이 열리자 한일 양국은 한국 측이 제출한 문화재 목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한다. 소네 아라스케 관련 문화재도 논의가 되는데, 먼저 제3회 문화재소위원회(1961년 11월 15일)에서 한국 측은 석굴암 관련 유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전략) 이것은 일본 시대에 수리된 것인데, 여기에 있는 십일면관음 앞에 큰 대(臺)만이 있다. 원래 이것에 작은 석탑이 있었는데, 이것이 현재는 없다. 또한 돔 주변에 감불이 10개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첫 번째와 열 번째 두 개가 없다. 그런데 그 행방에 대해 당시 경주에 있던 관리가 관계를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통감부 시대나 총독부 시대 초기에, 모 고관이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어서 한국 측은 제2회 전문가회의(1961년 11월 21일)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석굴암과 불국사의 유물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하는데, 석굴암 오층석탑 관련 설명은 아래와 같다.

ㄱ. 전기 "모로가" 저서에 "··· 그 외에 9면(원래는 11면) 관음 앞에 현존하는 기석 위에는 불사리가 들어 있다고 전해 온 소형의 아름다운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으나 지난 명치 41년 봄 대단히 높은 모대관의 순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는 구절이 있고

ㄴ. 그 외 "야나기" 저 "조선의 예술" 및 "오꾸다" 저 "신라 구도 경주지"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 제6차 회담 제2회 전문가회의에서 석굴암 오층석탑과 감불에 대해 논의하는 한일 양국.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 측이 석굴암 오층석탑 반출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모로가'와 '야나기'는 이전 칼럼(☞ 칼럼 제2부 ⑯ 참조)에서 설명한 모로가 히데오와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그리고 '오꾸다'는 오쿠다 야스시(奧田悌)라는 자로 경주 지역의 유물 수집가였다.

그가 쓴 <신라구도 경주지>(新羅舊都 慶州誌)에는 "십일면관음상 앞에 작은 석단(石壇)이 있는데, 원래 여기에 오층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네 통감 시대에 가져갔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저자는 이를 알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국 측이 석굴암 오층석탑을 가져간 자를 소네 아라스케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오층석탑을 가져간 것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측은 일본인이 석굴암 오층석탑 등을 반출했다고 주장하는 한국 측의 설명에 대해 민간인의 기록이라 신뢰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반론했고, 한국 측은 민간인의 자료도 역사 연구에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재차 반박했다.

일본 측, 소네 아라스케의 석굴암 오층석탑 반출을 믿을 수 없다

제3차 전문가 회의(11월 28일)에서도 석굴암 오층석탑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한국 측은 다시 모로가 히데오, 야나기 무네요시, 오쿠다 야스시의 기록을 예로 들면서 일본인들이 석굴암의 오층석탑과 감불, 불국사 석사자를 가져갔다고 설명했다. 일본 측은 한국 측 설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 방면에 가장 권위가 있는 후지타 교수의 '불국사와 석굴암'에는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일은) 세간의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모로가씨의 저서, 동씨의 강연 속기록 '경주의 신라 유적에 대해서'에 따라 한국 측은 '존귀한 모 대관'이 가지고 갔다고 말하고 있고, 소네 통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존귀한'이라는 형용사가 통감 등에는 사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전 이야기를 예로 들었지만, 종전 후 나쁜 짓을 한 것은 모두 일본인이라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풍조이기 때문에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한 판단으로서 일본에 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예술품의 소식에 정통한 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전혀 모른다고 했다. 또한 소네 통감의 이야기도 나왔으므로 일단 그 취지도 조사해 보겠다.

일본 측 설명의 요지는 오층석탑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거나 또는 다른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이다. 그 이유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기록을 들고 있다.

그는 조선에서 다수의 유물·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였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장과 경성제국대학 교수도 역임했다. 일본 패전 이후에는 일본고고학회 회장, 도쿄예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는 등 일본 고고학계의 권위자였다. 그는 1938년에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와 함께 <조선보물고적도감 1-불국사와 석굴암>(<朝鮮寳物古蹟圖録 第1-佛国寺と石窟庵>)을 썼다.

일본 측은 석굴암을 조사한 후지타 료사쿠라는 권위 있는 전문가의 견해를 빌려, '소네 아라스케가 오층석탑을 가져갔을 것이다'라는 기록을 부정했다. 이와 함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나쁜 짓을 했다'는 편견을 지적하면서 소네 아라스케나 일본인들의 오층석탑 반출 가능성도 부정했다.

석굴암 오층석탑 반출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가 드러나는 논의였고, 이는 비단 석굴암 오층석탑뿐만 아니라 문화재 반환 문제 전반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인식의 차이였다.

▲ 제6차 회담 제3회 전문가회의에서 석굴암 오층석탑과 감불을 논의하는 한일 양국. ⓒ한국정부 및 일본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 측은 일본 측의 의견에 대해 모로가 히데오가 경주박물관의 관장이었고, 그의 기록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 쓴 것이므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그 당시 일본의 황족이던가 그러한 귀인이 올 때는 못되고 역시 절대적 관권을 가진 통감("소네"를 가리킨다) 같은 사람을 표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한국 측에 증여할 수 있는 문화재 목록을 논의하고 있었다. 제6차 회담 재개가 얼마 남지 않은 1964년 2월 6일에 외무성, 문화재보호위원회, 도쿄국립박물관의 관계자가 모여 문화재 목록을 논의했다.

이때 외무성은 한국 측에 증여할 수 있는 고서적에 대해 "한국 측의 청구 목록에 있는 궁내청에 있는 소네본(曽禰本), 통감부본(統監府本), 야마구치 단대에 있는 데라우치 총독 기증서도 증여의 대상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3월 11일에 열린 외무성과 궁내청 간의 회의에서는 "궁내청 서릉부 소장 통감부 서적 11부 90책과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152부 762책에 대해서 (중략) 한국에 기증해도 일본학회로서 아깝지 않을 책에 한해 기증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소네 아라스케 반출 고서적 인도

제7차 회담이 진행되자 한국정부는 문화재 반환 문제를 비롯한 주요 의제에 대한 방침을 정한다.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최종 방침에는 한국 측이 제7회 문화재소위원회(1962년 2월 28일)에서 제출한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에 따라 문화재를 돌려받는다는 방침이 있었고, (가) 고고, 미술품, (나) 전적, (다) 체신 문화재와 같은 일본정부 소유 문화재, 그리고 (가) 오구라 수집품, (나) 데라우치 수집 한적, 서화, (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한국 문화재, (라) 석조물 중 석굴암의 합동불 2구 및 소석탑과 같은 개인 소유 문화재가 그 대상이었다.

▲ 제7차 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 최종 방침.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이중 소네 아라스케 관련 문화재는 일본 정부 소유의 (나)와 개인 소유의 (나)에 해당되었다. 전자에는 "가능한 최대한도로 실물 반환이 실현되도록 하고 그 외에 현재 일본 각 도서관, 문고 등에 보관하고 있는 임진왜란 시에 탈취한 귀중 도서의 복사 제공을 요구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에 '제2항 통감 및 총독 등에 의해 반출된 것' 중 '② 소네 아라스케 한국 전적(국유), 궁내청 도쇼료'가 있었는데, 최종 방침에 소네 아라스케 반출 고서적이 명기되지 않았지만, '전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후자는 "끝까지 확보해야 할 우선 품목"의 하나였다.

한일 양국은 1965년 4월 3일에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청구권 문제 합의사항 제6항목으로 합의하고, 6월 들어 어떤 문화재를 인도할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칼럼 제1부 ⑨ 참조).

▲ 일본 측이 제시한 '일한 간의 문화협력에 관한 의정서 부속서' 중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목록.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일본 측은 6월 11일에 '일한 간의 문화협력에 관한 의정서 부속서'를 제출했는데, 이는 일본 측이 인도하는 문화재 목록이었다. 여기에는 도자기 72점, 고고자료 291점, 석조미술품 3점, 도서 163부 852책, 체신 관계 문화재 35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네 아라스케 관련 고서적으로는 목민심서, 택리지, 난여 등을 포함한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152부 762책'이 있었다.

한국 측은 최종적으로 이 고서적을 인도받기로 했다. 다만 석굴암 오층석탑은 그 행방을 확인하지 못한 관계로 인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참고문헌

한일회담 관련 한국외교문서 및 일본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유종현, '일제강점기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조선 고대문화 인식과 그 변화 : '조선고고학연구'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제56집, 2017.

이동주, '奧田悌의 '慶州誌' 발간의 역사적 성격', <동국사학> 제51집, 2011.

奧田悌, <新羅舊都 慶州誌>, 玉村書店,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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