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이건 꼭 해야 해.”
어른들이 정해 준 문장을 따라 살던 아이 이도는 한자, 한글, 줄넘기, 종이접기, 영어까지 쉼 없이 배워 왔다. 문화센터와 학원을 오가며 빠짐없이 출석한 덕에 그의 이름 앞에는 온갖 ‘급수’가 따라붙는다. 어느새 별명이 ‘급수 왕’이 된 이유다. 그러나 이도는 안다. 급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진짜 실력이 생기거나,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줄넘기 학원에서 미리 5급을 따 둔 이도는 반 대표로 줄넘기 대회에 나가 보라는 추천을 받는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급수도 있는데 당연히 잘하겠지”라며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작 이도에게 대회는 기대보다 걱정의 대상이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배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쿡쿡 쑤신다. 병원 진단은 “아무 이상 없음”. 하지만 대회 날, 이도는 금세 탈락한다. 그가 가진 급수는 뛰어난 실력의 증거가 아니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성실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날, 이도는 처음으로 “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해야 하는 것’을 묵묵히 따라가던 아이가 처음으로 내놓은 자기 주장이다.
오늘날 아이들은 이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어떤 경험이 스펙이 되는지,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른들은 끊임없이 답을 제시한다. 아이들은 그 답을 따라 움직이며 시간표를 채운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의 목록은 점점 길어지지만,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라는 질문은 늘 뒤로 밀린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처음으로 학원을 가지 않은 날, 이도는 방 안에서 작은 지우개 하나를 꺼낸다. 급수도, 시험도, 정답도 없는 시간. 문구용 칼을 들고 지우개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빨개지고 물집이 잡혀도 멈추지 않는다. 누구의 지시도, 평가도 없는 이 시간은 이도가 스스로 선택한 첫 번째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도는 비로소 ‘해야 하는 나’가 아니라 ‘하고 싶은 나’와 마주선다.
그런 이도를 바라보는 양연주 작가의 경험도 비슷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생일마다 도장을 선물로 받으며 자라왔다. 견본집 속 예쁜 글씨들 가운데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도장을 만들었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수많은 도장 어디에도 ‘내 냄새’는 없었다는 사실을. 모두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글씨 중 하나를 고른 기성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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