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전통 민요는 한 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생활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낸 문화유산이다. 문헌으로 남지 않은 서민의 일상은 노래를 통해 전승됐고, 공동체는 노랫가락으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남도 민요 '남원산성' 역시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대표적인 구전문화다.
'남원산성'은 전라도를 비롯한 남도 지역에서 널리 불린 민요다. 첫 구절인 '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 바라보니'에서 제목이 비롯됐으며, 후렴에 반복되는 '둥가'라는 말 때문에 '둥가타령'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노래는 밝고 경쾌한 가락 덕분에 전문 소리꾼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숙하다. 남도 특유의 구성진 음색 위에 흥겨운 후렴이 더해지면서 잔치나 놀이판, 마을 행사에서도 자주 불렸다.
노랫말의 내용이 일정한 줄거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첫머리에서는 남원산성에 올라 새를 바라보는 풍경이 펼쳐지고, 이어 사랑과 연정, 혼례, 혼수, 생활용품, 젊은 남녀의 농담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구전 민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노래는 고정된 작품이라기보다 시대와 지역,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가사가 덧붙고 바뀌면서 살아 움직이는 문화였다. 필요한 내용을 즉흥적으로 이어 붙이는 방식 역시 민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는 모두 매의 종류를 가리킨다. 사람 손에서 길러진 매와 산에서 자란 매, 그리고 뛰어난 사냥매를 차례로 나열하며 자연을 바라보는 남도 사람들의 감각을 드러낸다.
석양이 내려앉은 하늘과 갈매기 울음, 늘어진 능수버들, 짝을 찾아 날아가는 꾀꼬리까지 이어지는 노랫말은 우리 전통 민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연 묘사와도 맞닿아 있다. 자연은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후렴인 "에헤야 듸야 어루 둥가 허허 둥가 둥가 내 사랑이로구나"는 노래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다. 특별한 뜻을 가진 말보다 소리 자체가 흥을 돋우며,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의 호흡을 하나로 묶어 준다. 공동체 민요에서 후렴이 갖는 역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랫말 가운데 "옥양목 석자 없다고 집안이 모두 다 야단인듸"라는 부분에서는 당시 서민 생활도 엿볼 수 있다. 옥양목은 근대 이전 귀한 면직물로 여겨졌으며, 몇 자의 천이 부족한 일조차 집안의 큰일이 될 만큼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현실을 보여준다.
"앞집 큰애기 시집을 가는듸 속없는 노총각 생병 났다더라"라는 대목에서는 해학이 살아난다. 혼인을 둘러싼 서민들의 감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남도 민요가 지닌 유쾌한 정서는 이런 표현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용장봉장', '자개 함롱', '반닫이', '문갑', '필연', '천은대야'는 당시 혼수품과 생활용품을 나열한 부분이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와 근대 초기에 사용된 생활문화와 혼례 풍습까지 함께 전해진다. 민요가 생활사를 기록하는 문화 자료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남원산성'에는 경기 민요와 경기잡가의 흔적도 확인된다. "니가 나를 볼라면 심양강 건너가", "설마 설마 설마 서 설마 제일 천하 낭군이 니가 내 사랑이지"라는 부분은 경기 민요 '달거리'와 매우 유사한 노랫말이다. 지역을 넘어 노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승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같은 교류는 민요가 특정 지역 안에만 머문 문화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장터와 나루터, 보부상, 유랑 예인, 광대패를 거치며 다양한 노래가 전국으로 퍼졌고, 지역마다 새로운 가락과 가사가 더해졌다. '남원산성' 역시 그런 전승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남도 민요 가운데에서도 '남원산성'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에 있다. 전문적인 판소리 기법을 몰라도 후렴을 함께 부를 수 있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널리 전승됐다. 국악 공연과 민요 발표회에서도 빠지지 않는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남원산성'은 국악 교육 현장에서도 자주 활용된다. 학생들은 이 노래를 통해 남도 특유의 시김새와 민요 창법을 배우고, 전통 음악이 품고 있는 생활문화와 공동체 정신도 함께 익힌다. 노래 한 곡이 음악 교육을 넘어 역사와 민속을 이해하는 자료가 되는 셈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새로운 세대가 다시 이어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남원산성'은 남도의 흥과 서민의 삶, 자연을 바라보는 정서, 지역을 넘나든 민요 교류의 흔적까지 함께 품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도 '남원산성'이 꾸준히 불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 곡의 노래 안에는 웃음과 사랑, 자연과 생활, 공동체와 전통이 함께 살아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노랫가락은 오늘도 새로운 목소리를 만나며 우리 문화의 시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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