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영 연출의 과감한 번역대본 수정…관객이 불편하지 않은 오페라
'최고의 칼라프' 선보인 백석종…2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세계적인 테너 백석종의 출연으로 일찍부터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기대를 모은 2026 예술의전당 오페라 '투란도트'가 지난 22일 저녁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예술의전당 '투란도트'에선 연출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한 정선영의 깊은 사유와 남다른 연출 감각이 돋보였다. 그 덕분에 해외의 어떤 화려한 프로덕션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를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투란도트'는 여성 노예의 희생을 딛고 공주와 왕자가 행복하게 결혼한다거나, 완력에 의한 첫 키스로 '얼음공주'였던 투란도트가 갑자기 투쟁 의지를 상실하고 사랑에 빠져든다는 개연성이 떨어지는 서사로 인해 음악의 완성도가 아무리 높아도 관객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1926년 초연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당연히 거슬리는 내용이어서, 종종 투란도트가 자살하거나 칼라프를 죽이는 등의 바뀐 결말로 공연돼도 요즘 관객들은 그리 놀라지 않는다.
정선영은 연출과 무대디자인, 그리고 대본 고쳐 쓰기를 통해 이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했다. 투란도트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대신 칼라프는 무릎을 꿇고 '서로의 마음이 맞닿아 이루는 평화와 사랑'을 호소하고, 투란도트는 이를 받아들인다. 타자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대신 자발적 헌신으로 평화에 도달하자는 반전(反戰)의 의지를 담은 연출이다.
출연 성악가들은 이탈리아어 대본의 가사를 원문대로 노래하지만, 한글 자막과 영문 자막에선 많은 부분이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쓰였다. 이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독일어 희곡 '투란도트'와 마찬가지로 '예술을 통한 미적 교육'의 이상을 담은 수정 대본이라 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막 오페라 무대에 오른 백석종의 존재감도 공연의 질을 한껏 끌어올렸다. 전쟁 난민들 틈에서 칼라프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백석종의 명징한 스핀토(밀어붙이듯이 몰아치는 목소리)와 투명하게 뻗어나가는 고음은 단번에 귀를 매혹했다. 백석종은 힘주어 밀어 올리거나 공들여 만들어낸 소리가 아닌 너무도 자연스러운 발성과 풍부한 성량으로 가사와 음악의 의미를 정교하게 전달했다. 관객들도 공연 내내 예사롭지 않은 열광으로 호응했다.
폴란드계 미국 소프라노 에바 프원카의 투란도트는 성량과 파워, 선명한 고음뿐만 아니라 뛰어난 표현력으로 복잡하고 상처 입은 투란도트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류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 티무르 왕 역의 베이스 심인성, 알툼 황제 역의 테너 전병호 모두 귀에 꽂히는 음색과 가창력으로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중국 대신들인 핑, 팡, 퐁 역의 바리톤 김종표, 테너 김재일, 테너 서범석의 유연한 가창과 유쾌한 연기는 관객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만다린 역의 젊은 바리톤 김건은 치밀한 해석력을 보여 더 큰 발전을 기대하게 했다.
로베르토 아바도가 이끈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초반 대규모 군중 장면에서 다소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였지만,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며 어느 때보다도 탁월한 연주를 들려줬다. 대부분의 '투란도트' 공연에서 평이하게 연주되는 '왜 이리 달이 안 뜨나'와 '모리화' 합창 장면에서 음악의 아름다움이 특히 두드러졌던 것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공로다. 노이 오페라 코러스와 CBS소년소녀합창단은 대단히 복잡하고 빠른 군중 장면들을 어느 '투란도트' 공연보다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특별한 가창을 선사했다.
매 순간 효과가 뛰어났던 무대와 의상, 영상과 조명은 모두 연출가의 의지와 이상에 조응했다. 김환이 디자인한 의상은 무채색을 주조로 명도와 채도를 다양하게 조절한 세련된 감각의 전통의상이다. 하늘에도 전운(戰雲) 같은 먹구름이 가득한데, 이 잿빛 현실에서 핑, 팡, 퐁은 고서를 읽으며 유유자적하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야기한다. 이때 이들 상상 속의 푸른 연못이 한 조각 푸른 천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이 깊은 감동을 줬다.
표면이 부식된 부서진 함선 모양의 요새는 투란도트 내면의 깊은 상처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로 보이지만 출연자들의 동선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무대로 기능했다. 그 위에 투사된 빛이 만들어내는 색채와 문양은 오묘하고 강렬했다. 황궁의 황금빛 옥좌를 아득한 하늘의 환상처럼 설치한 테크닉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새를 채웠던 칼날과 창 촉이 다 사라지고 마침내 푸른 하늘이 드러난 무대 위의 기적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면. 공연은 두 캐스트로 23일, 25∼26일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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