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볼보자동차코리아가 차세대 순수 전기 플래그십 '볼보 ES90'을 공개했다. 그런데 차량의 디자인과 성능보다 가격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싱글 모터 익스텐디드 레인지 플러스는 7294만원, 싱글 모터 익스텐디드 레인지 울트라는 8055만원이다. 트윈 모터 플러스는 7960만원, 트윈 모터 울트라는 8741만원이다. 가장 강력한 트윈 모터 퍼포먼스 울트라도 9541만원이다.
ES90 차체 길이는 5m에 이르고 휠베이스는 3.1m다. 볼보자동차 최초로 800V 시스템을 적용해 최대 350㎾ 급속충전 환경에서 배터리 잔량 10%에서 80%까지 약 22분 만에 충전할 수 있다. 1회 충전 주행거리는 글로벌 WLTP 기준 최대 706㎞다. 엔비디아와 퀄컴 기술을 결합한 차세대 지능형 플랫폼 휴긴 코어(Hugin Core)도 탑재했다. 5개 카메라와 5개 레이더, 12개 초음파 센서를 갖추고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출고 이후에도 기능과 성능을 개선한다.
이처럼 ES90은 볼보가 가진 전동화와 소프트웨어, 안전 기술을 한데 모은 차세대 플래그십이다. 그런데 국내 판매가격은 700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기존 S90 T8보다 최대 1800만원 낮고, 대형 전기 SUV EX90의 시작가격 1억620만원과 비교하면 3326만원 저렴하다.
왼쪽부터 이윤모 볼보자동차코리아 대표, 오스카 베르틸손 올스보르 볼보자동차 90라인업 및 글로벌 세일즈 총괄. ⓒ 볼보자동차코리아
볼보자동차코리아는 ES90의 국내 판매가격이 글로벌 주요 시장보다 약 5000만원 낮다고 강조했다. 보통 신차가 나오면 디자인과 성능, 새로운 기술을 먼저 이야기하지만 ES90에서는 7294만원이라는 숫자가 모든 설명을 앞선다.
그렇다면 ES90은 왜 이렇게 싼가. 볼보는 왜 이 가격을 택했을까.
◆수익성까지 감수한 7294만원
볼보자동차코리아가 밝힌 첫 번째 답은 직접적이다. 이윤모 볼보자동차코리아 대표에 따르면 원화 가치 하락으로 수익성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ES90의 국내 가격을 낮추기 위해 본사와 장기간 협상을 거쳤다. 제품 원가가 낮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가격이 아니라, 수익성 부담을 감수하고 확보한 전략 가격이라는 설명이다.
"ES90의 가격을 이처럼 공격적으로 책정하면서 볼보자동차코리아의 마진은 사실상 마이너스인 상황입니다. 한국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가격을 확보하기 위해 본사와 오랜 시간 논의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협상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한국은 볼보자동차의 세단 판매에서 글로벌 2위에 해당하는 핵심 시장이자 ES90과 같은 프리미엄 전기 세단이 성장할 잠재력이 매우 큰 시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본사를 지속적으로 설득한 결과, 수익성 부담에도 전 세계 어느 시장과 비교해도 가장 경쟁력 있는 수준의 가격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이윤모 대표
ES90은 7294만 원부터 시작하는 전 세계 최고 수준의 파격적인 가격으로 본격적인 판매에 나섰다. ⓒ 볼보자동차코리아
물론 '마진이 사실상 마이너스'라는 표현은 볼보자동차코리아의 설명이다. 차량 한 대당 본사 공급가격과 수입사·딜러사의 구체적인 마진 구조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입사 대표가 신차 출시 현장에서 수익성 악화를 직접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적어도 ES90의 국내 가격이 통상적인 수입·유통 마진을 그대로 반영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유럽보다 5000만원 싼 배경
다만 볼보자동차코리아의 수익성 부담만으로 해외와 최대 5000만원에 이르는 가격 차이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ES90은 스웨덴이나 유럽이 아닌 중국 청두 공장에서 생산된다. 한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판매 물량이 같은 공장에서 생산되며 동일한 배터리가 적용된다.
문제는 중국산 전기차가 유럽으로 들어갈 때다. 유럽연합은 중국산 배터리 전기차에 상계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볼보가 속한 지리그룹에 적용되는 세율은 18.8%다. 여기에 국가별 부가가치세와 판매 사양, 환율 차이까지 더해지면서 유럽 판매가격이 높아지고 한국과의 격차도 커지는 구조다.
ES90은 EV 설계가 주는 자율성을 바탕으로 세단의 우아함과 패스트백의 유연성, SUV의 넓은 실내 공간과 높은 지상고를 결합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모델이다. ⓒ 볼보자동차코리아
따라서 '유럽보다 5000만원 저렴하다'는 표현을 볼보자동차코리아가 한국 고객을 위해 5000만원을 모두 깎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유럽의 추가 관세와 국가별 세금 차이가 포함된 비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ES90의 국내 가격 경쟁력이 유럽의 높은 가격에서 만들어진 착시라는 뜻도 아니다. 해외와 비교하지 않아도 7294만원은 낮다. 같은 볼보의 S90 T8보다 저렴하고, 5m급 차체와 800V 전동화 시스템을 갖춘 플래그십 전기차가 국내 프리미엄 준대형 세단 가격대에 들어왔다.
유럽의 관세와 세금은 해외와 한국의 가격 격차를 키운 배경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7294만원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인 요인으로 볼보자동차코리아가 제시한 것은 본사와의 가격 협상과 자신들이 감수한 수익성 부담이다.
◆한국은 볼보 세단 판매 2위
그렇다면 볼보는 왜 수익성까지 희생하면서 가격을 낮췄을까. 답은 한국시장의 특수성에 있다. 볼보에게 한국은 세단 판매량 기준 글로벌 2위에 해당한다. SUV 중심으로 재편된 다른 시장과 달리 ES90과 같은 프리미엄 전기 세단이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ES90은 볼보자동차의 차세대 '안전 공간 기술(Safe Space Technology)'을 적용한 모델이다. ⓒ 볼보자동차코리아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볼보자동차코리아의 전체 판매 규모는 독일 프리미엄 3사와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기존 프리미엄 시장에서 단기간에 이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직 뚜렷한 지배자가 정해지지 않은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ES90은 볼보가 기존 시장의 순위를 뒤쫓는 대신 새롭게 형성되는 시장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기 위해 꺼낸 카드다.
"현재 볼보자동차의 전체 판매 규모는 독일 프리미엄 3사와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할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서는 최고의 상품 경쟁력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이끄는 1위 브랜드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ES90은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초석이 되는 모델입니다. 공격적인 가격을 통해 더 많은 고객이 볼보의 프리미엄 전기차를 경험하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국내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서 넘버원 브랜드가 되겠다는 목표와 비전을 실현해 나가겠습니다." - 이윤모 대표
상위 클래스 수준의 3.1m의 휠 베이스의 넓은 실내 공간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스칸디나비아 리빙 룸 컨셉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인간 중심 기술을 통해 퍼스트 클래스 수준의 공간 경험을 완성했다. ⓒ 볼보자동차코리아
결국 ES90의 가격은 한 모델의 판매량만을 위한 결정이라기보다 더 많은 고객에게 볼보의 전기차를 경험하게 하고, 국내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서 브랜드의 입지를 끌어올리려는 장기 전략이다.
기존 내연기관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고객까지 순수 전기차의 잠재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독일 브랜드가 주도해 온 프리미엄 세단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확보하려는 계산으로 읽힌다.
◆낮은 가격이 부른 물량 딜레마
공격적인 가격에는 역설도 따른다. 낮은 가격은 고객에게 강력한 구매 유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차량 한 대를 판매할 때 얻는 수익이 다른 시장보다 낮다면 본사 입장에서는 한국에 많은 물량을 배정할 유인이 줄어든다.
공장의 생산능력은 한정돼 있다. 같은 차량을 더 높은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시장에 공급하려는 본사의 판단과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한국시장을 키우려는 볼보자동차코리아의 목표가 충돌할 수 있다.
이윤모 대표는 ES90이 전동화 미래를 향한 볼보자동차의 비전과 모든 기술력을 집약한 차세대 플래그십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 볼보자동차코리아
"마진이 좋다면 한국시장의 물량을 확보하는 것도 훨씬 수월합니다. 그러나 공장의 생산능력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본사에서는 어느 시장에 차량을 공급해야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ES90은 한국에서 매우 공격적으로 가격을 책정했기 때문에 한국에 물량을 배정할수록 수익성 측면에서는 마이너스가 발생하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한국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만을 보고 사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본사를 계속 설득하고 있습니다." - 이윤모 대표
ES90의 공격적인 가격은 고객에게는 구매 문턱을 낮추는 요소지만, 볼보자동차코리아에는 물량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한국에서 판매할수록 수익성이 낮아지는 구조라면 본사가 다른 시장을 우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볼보자동차코리아는 현재의 수익성 부담을 미래를 위한 투자로 보고 있다. 당장 이익을 남기기보다 ES90을 통해 한국시장에서 브랜드의 기반을 넓히고, 향후 5년 또는 10년 뒤 성장의 성과를 거두겠다는 구상이다.
결국 ES90의 성패는 두 번의 설득에 달렸다. 먼저 7294만원이라는 가격과 상품성으로 한국 고객을 설득해야 한다. 동시에 낮은 수익성에도 한국시장에 충분한 물량을 배정해야 한다고 본사를 설득해야 한다.
전략 가격을 확보하는 첫 번째 싸움은 끝났다. 이제 볼보자동차코리아에게는 그 가격을 실제 수요와 충분한 물량으로 연결해야 하는 더 어려운 싸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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