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로 위장한 학습, 영유아 교실의 ‘놀이’는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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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로 위장한 학습, 영유아 교실의 ‘놀이’는 어디로 갔나?

베이비뉴스 2026-07-22 16:13:00 신고

베이비뉴스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유아교육포럼은 조기 사교육 광풍 속에 대한민국 아이들의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한 26인의 릴레이 기고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를 연재합니다. 4살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치르고, 만 5세가 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실이 텅 비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영유아 교육의 현실입니다. 조기 선행학습은 아이들의 발달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놀이와 탐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영유아 교육 현장의 교사, 연구자, 부모, 정책 전문가 26인은 조기 사교육이 아이들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교육 현실을 짚고, 국가와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조기가 아닌 ‘적기교육’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제안합니다. 빨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때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권리입니다. -편집자 말

조기 사교육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길러야 할 자율성과 사회성을 잃고 있으며, 놀이를 보장하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 ⓒ베이비뉴스 조기 사교육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길러야 할 자율성과 사회성을 잃고 있으며, 놀이를 보장하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 ⓒ베이비뉴스

일곱 살 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교실로 들어왔다. 여름방학이 지난 8월, 우리 반에 새로 온 아이였다. 또래보다 키도 작았고 마른 체구에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함께 온 엄마는 상기된 얼굴로 아이의 입학 전 경험을 늘어놓았다. 네 살 무렵부터 다녔다던 영어 학원, 값비싼 놀이학교, 얼마 전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받았던 상.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표정 뒤 아이는 그저 멍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네 살부터 영어를 시작해 일곱 살에 상을 받는 아이. 많은 부모가 바라는 성공의 공식에 가까웠다. 

일찍 시작할수록 유리하고 남보다 앞서면 나중이 편하다는 믿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믿음이다. 나는 유아교육 현장에서 1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친 교사였고 지금은 영유아 사교육문제를 들여다보는 연구자다. 두 자리에서 같은 장면을 바라본다. 좋은 것을 일찍 손에 넣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향한 곳에서 아이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이다.

◇ 놀 줄 모르는 아이

유난히도 블록놀이를 좋아했던 우리 반 남자 친구들은 블록으로 팽이를 만들어서 놀기도 하고 건축물도 만들었다. 교실에 비치된 모든 종류의 블록이란 블록은 다 꺼내 아주 긴 도로를 만들고 자동차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하원하기 전 “선생님, 제 꺼는 부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정리하지 않고 다음 날까지 놀이를 이어가겠다는 우리 반만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달랐다. 환경이 낯설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 판단했던 내 생각은 며칠 만에 빗나갔다. 아이는 놀지 못했다. 정확하게 바꿔 말하면 노는 법을 몰랐다. “선생님, 이제 뭐 해야 돼요?”라고 물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으로 돌아온다. 그 아이에게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놀이의 자유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되는 것 같았다. 바깥놀이도, 간식시간도, 실내놀이 시간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여덟 살 형님이 된다는 즐거움과 크리스마스 선물의 기쁨이 가득했던 추운 겨울, 결국 아이는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타고난 기질이었을 수도 그간 견뎌온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확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이는 놀 줄 몰랐다.

◇ 놀이는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란 그럼 무엇일까? 놀이는 흔히 공부의 반대말로 불린다. ‘실컷 놀았으니 이제 공부하자’고, ‘공부 끝났으니 좀 놀아’라고 말한다. 놀이는 채워야 할 것을 다 채우고 남는 한가한 여가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유아에게 놀이는 여가가 아닌 세상을 이해하는 배움의 시간이다. 놀이터에서 모래로 물길을 만드는 아이들은 협동이라는 것을 배운다. 역할놀이를 하면서 누가 엄마와 아기를 할 것인지 다투는 아이들은 때로는 양보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것도 배운다. 놀이하다 토라진 친구에게 손을 다시 잡는 아이는 화해를 배운다. 유아는 놀이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끝까지 해내는 힘을 기른다. 이것은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을 뿐더러 충분히 놀아본 아이만이 배울 수 있다.

앞선 사례의 남자아이가 놀이 앞에서 망설인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네 살 때부터 아이의 하루는 어른이 짜놓은 촘촘한 인지 학습의 순서로 채워져 있었다. 스스로 틈을 만들 여유 없이 시키는 대로 하면 칭찬이 돌아오는 그 세계 말이다. 그 세계에는 언제나 정답이 있다. 정답이 없는 놀이의 세계에 던져지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은 것이다.

놀이식 학습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교사가 짜놓은 순서를 따라가고 잘하면 상을 받는 활동은 아무리 즐거운 놀이라는 포장지를 씌워도 놀이가 아니다. 놀이의 조건은 하나, 유아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주도권이 어른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학습이다. 놀이를 흉내 낸 학습을 오래한 아이들은 진짜 놀이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른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매년 가을께 치열한 유치원 입학설명회가 끝나면 부모들이 던지는 질문은 늘 정해져 있다. 

“그래서 진짜 놀기만 하는 건 아니죠?”

놀이를 지키려는 유치원은 유별난 곳이 되고 특성화프로그램을 많이 하는 유치원은 좋은 곳으로 통한다. 그 틈에서 원장은 기관의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부모님들이 바라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교사들은 원의 방침이라 어쩔 수 없다, 부모들은 옆집아이가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다.’ 얼핏 들으면 개인의 체념과도 같다. 생존의 경쟁이 원칙을 잠식할 때 꺼내드는 자기합리화의 문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일곱 살에게 선행을 들이미는 이 사회가 부모와 기관에게 혼자 버티라며 등 떠민 결과다. 원장을, 교사를, 부모를 탓해서는 이 말을 멈출 수 없다. 그 말을 하도록 등을 떠미는 사회의 구조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이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이들의 놀이시간이다.

유아를 우리는 미래의 인재라 부른다. 그 말에는 유아를 미성숙한 존재로, 자라나서 무엇이 될 준비물로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있다. 그렇기에 오늘의 놀이는 내일의 성취를 위해 얼마든지 미뤄도 괜찮을 것이 된다. 그러나 유아는 미래의 준비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이다. 오늘 놀지 못한 아이에게 흘려보낸 하루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 놀이를 지키는 일은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분명하다. 어떤 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도록 그 시간을 사회가 지키는 것이다. 영유아중심·놀이중심을 선언한 국가 교육과정이 그저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교실에서 지켜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일, 원아모집 경쟁이 교육과정을 흔들지 못하도록 공적인 기반을 두텁게 쌓는 일이 그 출발이다. 놀이를 지키는 일이 개별 원의 용기와 부모의 결단에 맡겨져 있는 한, 놀이는 언제나 가장 먼저 밀려난다.

내가 만났던 그 아이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다. 해가 바뀌고 졸업하며 그 아이는 놀 줄 모르는 채 학교에 진학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교실에서는 놀아야할 시간에 놀 줄 모르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빨리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로 제대로 자라게 하는 것.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배울 시간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가장 어린 시민에게 우리 사회가 져야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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