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인공지능(AI)가 이미지를 생성하고 복제하는 기술은 이제 놀라운 수준에 도달했다. 정교한 묘사는 더 이상 인간만의 능력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 변화 속에서 회화는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슈페리어갤러리에서 열리는 박성민 개인전 '시선이 사유가 될 때'는 이 시대 회화가 품어야 할 방향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제시한다.
전시는 작가의 대표 연작인 '아이스 캡슐'과 최근 발표한 도자기 연작을 함께 배치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표현 대상은 달라졌지만, 오랫동안 바라본 대상 안에서 시간의 흔적과 감각을 끌어내려는 작가의 태도가 한 줄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성민은 국내 극사실회화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200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과 '동아미술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주목받았고, 이후 국내외 주요 화랑과 아트페어를 통해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해 왔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이어온 작업을 집약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국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초기 '아이스 캡슐' 연작은 얼음 속에 갇힌 과일과 식물을 압도적인 사실성으로 담아냈다. 차갑게 응고된 순간은 생명과 시간의 멈춤을 상징했고, 관람자는 투명한 얼음 너머에 존재하는 미세한 변화까지 바라보게 된다.
최근 발표한 'Evolution' 연작은 시선을 전혀 다른 대상으로 옮긴다. 화면에는 도자기의 표면이 거대한 풍경처럼 펼쳐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색의 번짐과 균열, 미세한 흔적이 드러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색면회화를 연상시키는 추상 이미지로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화면이 상상력이나 우연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실제 도자기의 표면을 오랜 시간 관찰한 뒤 극도로 확대해 캔버스 위에 옮긴다. 확대된 화면에서는 원래의 형상이 사라지는 대신 색과 붓질, 물질감만이 남는다.
여기서 박성민의 회화는 극사실과 추상이 서로 맞닿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과정이 오히려 추상적 이미지로 이어지는 역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존 색면회화가 색 자체의 자율성을 강조했다면 박성민의 화면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화면을 이루는 색은 실제 사물에서 비롯됐으며,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흔적과 물성이 살아 있다. 보는 이는 추상처럼 느끼다가도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또 다른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붓질 역시 눈여겨볼 부분이다. 화면을 메운 수많은 터치는 물질을 흉내 내기 위한 기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시간이 쌓인 기록이며, 작가의 신체가 남긴 흔적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이미지를 만들어도 이 물리적인 축적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기술과 인간의 대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바라봄의 시간과 손의 반복을 조용히 드러낸다. 회화의 가치는 결과보다 과정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화면 스스로 증명한다.
관람자는 작품 앞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화면은 낯선 추상이 되고, 한 걸음 물러서면 다시 현실의 사물이 떠오른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왕복하며 화면 속 시간을 따라가게 된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외형보다 오래 축적된 흔적을 바라보려 했다고 밝힌다. 사람과 사물 모두 겉모습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오래 바라볼 때 비로소 숨겨진 의미가 드러난다는 인식이 작가의 작업 전반을 관통한다.
그 철학은 최근 연작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도자기의 미세한 흔적을 극도로 확대하는 작업은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만들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물질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박성민의 회화는 극사실이라는 장르를 기술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뒤 그 너머에서 회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각을 탐색한다. 재현의 완성도가 아니라 바라보는 시간과 축적된 경험이 작품의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AI 시대 이후 회화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해답을 거창한 선언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 대상을 바라보고, 손으로 반복하며, 화면에 시간을 새기는 과정 자체가 회화의 미래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시선이 사유가 될 때'는 극사실회화의 현재를 돌아보는 전시에 머물지 않는다. 오랜 응시 끝에 탄생한 화면은 재현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가 여전히 인간만의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깊은 여운으로 남긴다.
박성진 작가의 개인전 '시선이 사유가 될 때는 7월 21일부터 8월 10일까지 슈페리어갤러리에서 열린다.
사진=슈페리어겔러리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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