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전시장을 나오는 길, 가장 오래 남아 있던 것은 화려한 설치 작품도, 귀여운 캐릭터도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에는 종이를 자르는 소리와 연필이 종이를 스치는 감촉, 그리고 한 장의 종이가 누군가의 세계가 되어가는 과정이 잔잔하게 맴돌았다.
평소 SNS에서 페이퍼 후추의 영상을 본 적은 있었지만, 작은 휴대폰 화면 속 콘텐츠를 하나의 전시로 어떻게 확장했을지 궁금했다. 영상을 전시장으로 옮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화면 속에서는 편집과 카메라 구도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만, 실제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걸어 다니며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시장 입구에 적혀 있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핸드폰 안의 영상이 공간으로 펼쳐진다.” 이 문장은 이번 전시의 핵심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익숙한 캐릭터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캐릭터를 크게 만들어 놓은 포토존이 아니었다. 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장면들이 실제 공간 안으로 튀어나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몇 초 만에 지나가던 이미지가 실제 크기로 존재하니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완성된 결과’ 대신 ‘완성되기 전의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다. 벽과 바닥을 가득 메운 수백 장의 스케치는 하나의 작품이라기보다 생각의 흔적처럼 보였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의 낙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캐릭터, 연결되지 않은 장면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보통 전시에서는 완성된 결과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미완성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작업을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완성된 작품 앞이 아니라 캔버스 앞이다. 한지 위에 첫 선을 긋기 전, 수없이 지우고 다시 그리는 시간이 작품보다 훨씬 길다. 하지만 그 시간은 늘 관람객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페이퍼 후추는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을 과감하게 전시장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작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소리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보통 전시는 시각예술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전시는 오히려 ‘소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종이를 접고, 자르고, 구기고, 문지르는 소리.
사각사각.
찰칵.
타라라락.
벽면에는 이런 의성어들이 하나의 문장처럼 적혀 있었고,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소리는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리를 들을수록 오히려 눈보다 손끝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이다. 종이를 만지고 싶고, 직접 잘라보고 싶고, 만들어 보고 싶어진다. 전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 된다.특히 시각을 최소화하고 소리에만 집중하도록 구성한 공간에서는 ‘본다’는 행위보다 ‘느낀다’는 경험이 훨씬 강하게 다가왔다.예술은 꼭 거대한 캔버스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종이 한 장.
가위 하나.
펜 하나.
누군가는 그 단순한 재료로 수천만 명이 사랑하는 콘텐츠를 만든다. 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었다. 이번 전시를 보며 또 하나 느낀 점은 콘텐츠와 전시는 이제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하나의 세계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전시가 되어가고 있다. 캐릭터를 좋아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ASMR을 좋아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공간 자체를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다.결국 하나의 콘텐츠가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 점은 캐릭터 작업을 하는 나에게도 많은 생각을 남겼다. 나는 ‘몽다’와 ‘거복이’를 통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림과 전시, 교육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보면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보다 ‘캐릭터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행복을 직접 만지고, 듣고, 느끼는 공간. 관람객이 ‘몽다’의 하루를 걸어보고, ‘거복이’와 함께 소원을 적어보고, 한지를 만지며 자신만의 행복을 완성하는 경험. 그런 전시가 된다면 작품은 더 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전시를 나오며 가장 크게 남은 것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었다. 종이였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쉽게 지나치는 가장 평범한 재료. 그 한 장의 종이를 통해 누군가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 세계를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다. 예술은 언제나 새로운 재료를 찾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을 이번 전시는 조용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한지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한지 위에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감각을 선물하고 싶은가.’
페이퍼 후추의 전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 더 좋은 질문을 남겨주었다는 점에서 오래 기억될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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