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곳을 향한 노스탤지어…김정현이 복기한 상실의 ‘그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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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곳을 향한 노스탤지어…김정현이 복기한 상실의 ‘그날들’

스포츠동아 2026-07-20 08:21:04 신고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스포츠동아 장은지 기자] 우리는 누구나 가보지 않은 곳에 그리움을 품는다. 미국의 작가이자 신경학자인 존 쾨닉은 그의 책 ‘슬픔에 이름 붙이기’에서 이를 ‘아네모이아’(anemoia)로 정의했다. 경험하지 못한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뮤지컬 ‘그날들’은 고(故) 김광석의 명곡들을 하나의 이야기와 엮어 재탄생시킨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2013년 초연한 이래 이번이 일곱 번째 시즌으로, 김광석 30주기를 맞아 3년 만에 돌아왔다. 김광석의 노래가 한창 불리던 시간은 기껏해야 1980년대 중반부터 그가 사망한 1996년까지이지만, 김광석과 그의 음악은 단순한 유행가로 휘발되지 않는 한 시대가 아로새긴 ‘불멸의’ 기억이다.

시대의 기억은 구전되고 심지어는 유전되기 마련이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그의 노래 앞에선 속절없이 그 기억의 어스름에 빨려 들어가고 만다. 공연에는 김광석을 또렷이 기억하는 중장년층은 물론, 희미하게 더듬은 젊은이들이 또한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극의 중심축인 두 인물, 정학과 무영 캐스팅 라인업은 김정현과 윤시윤이었다.

복수로 된 ‘그날들’이 암시하듯 극에는 두 개의 ‘그날’이 있다. 청와대 경호원인 정학과 무영은 1992년 한중 수교 행사를 앞두고 ‘누군가’를 보호하라는 특별 임무를 받는다. 그리고 30년 후 현재,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정학은 어느덧 청와대 경호부장이 돼 있다. 현재의 그날, 30년 전 ‘그날’과 같은 의문의 실종 사건이 고스란히 반복되면서, 정학은 현재의 사건과 평행선을 달리는 과거의 사건, 그리고 무영의 비밀을 다시 되짚어 나가게 된다.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현재의 그날과 과거의 그날은 비슷한 사건을 공통 분모로 교차한다. 여기서 일련의 사건의 배열 방식을 뜻하는 ‘플롯’(Plot)은 한방향으로 질서 있게 흐르지 않는다. 흩어진 기억과 잘못 읽은 진실처럼, 시간 순서를 헤집어 놓은 비선형적 서사 구조를 취한다. 시점(視點)과 시점(時點)도 뒤엉킨다. 대부분의 화자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정학이지만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는 지점에서는 뒤바뀐다. 이야기 역시 시간의 흐름이 아닌 오직 사건의 단서와 비밀에 의해 전개된다.

정학은 사건의 당사자이면서도 이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관찰자다. 정학의 시점과 이해의 범주는 관객과 시시각각으로 연동된다. 말하자면 정학은 ‘그날들’의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다. 극의 몰입을 위해선 정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까닭이다. 정학 역을 맡은 김정현은 이번이 뮤지컬 데뷔작이다. 전작 드라마 ‘세이렌’에서 재력가 백준범의 이면과 미스터리를 집요하게 줄타기 했던 그는, 뮤지컬 데뷔작에서 극의 ‘중심축’으로 나서는 대범함을 보였다. 

고 김광석의 노래는 폭발적 고음이나 화려한 기교를 필요로 하는 노래들과는 거리가 멀다. 짙은 감성과 사색적인 정서, 담담함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과장되지 않은 비브라토로 자연스러운 울림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한 곡이다. 곡의 서사와 감정에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미 다수의 매체를 통해 입체적인 연기력을 입증한 배우를 기용한 것에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그날들’에서 정학 역을 맡은 김정현.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그날들’에서 정학 역을 맡은 김정현. 사진제공 | 매니지먼트 시선

사극과 판타지, 로맨스와 장르물을 유려하게 오가며 매번 예측 불가능한 얼굴을 보여주었던 김정현의 진가는 무대 위에서 비로소 만개했다. 그는 정학이 삼켜내야 했던 우정과 사랑, 찰나의 질투와 지독한 열패감, 그리고 거대한 음모 앞에서의 개인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단순히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음 한 음에 절박하게 꾹꾹 눌러 담아냈다.

가려진 그날의 비밀이 하나씩 베일을 벗을 때마다 그가 표현해내는 혼란과 회한의 소요는 객석의 숨소리마저 잦아들게 만들 만큼 섬세했다. 결코 관객을 먼저 앞서가지 않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연기는 층층이 쌓여 마침내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관객의 가슴에 가닿는다. 무대 위 실연자와 객석의 관람자가 온전히 같은 감정의 고도에서 호흡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클라이맥스 구간에서 마침내 빛을 발했다.

제2막은 진실을 추적하는 호흡이 가팔라지며 관객의 심박수를 전율로 채운다. 정학과 무영, 진실과 거짓, 갈등과 회복의 콘트라스트와 파열을 지나 마침내 화해에 방점을 찍는 서사는, 김광석의 대중적인 명곡들과 결합하며 폭발력을 얻는다. 인물들의 비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흐르는 김광석의 구슬픈 멜로디는 익숙함 속의 참신함, 그리고 먹먹한 애절함을 증폭시켰다. 여기에 무대를 가득 채우는 앙상블의 강렬한 군무는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2막의 클라이맥스는 원곡의 서정을 넘어선 비장함과 결연함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넘버들로 채워진다. 감정을 차곡차곡 축적해 온 김정현은 그 순간 온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열창한다. 자신의 한계를 최대치로 밀어붙이는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는 하나의 절규가 되어 객석을 집어삼키고, 관객들을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인도했다.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뮤지컬 ‘그날들’ 스틸컷

과거와 현대의 ‘그날’이 맞물리며 나아가는 ‘그날들’의 종착지는 결국 관계의 회복이다. 오독했던 과거의 진실을 바로잡고 시린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정학의 여정은 결국 단절되었던 시간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복원하는 과정과 다름없다. 이 묵직한 서사 위로 김광석의 음악이 흐를 때, 극은 비로소 한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 세대를 관통하는 위로와 연대의 장으로 확장된다.

그 시절을 몸소 통과하지 않은 젊은 세대조차 이 무대 위에서 기어이 깊은 그리움을 마주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학의 사려 깊은 시선을 빌려 도달한 그날의 끝자락에서 관객은 저마다의 가보지 못한 시간 혹은 잃어버린 기억을 위로받는다. 김광석 30주기를 맞아 돌아온 일곱 번째 시즌이 여전히 변함없는 생명력으로 객석을 채우는 이유이자, 극의 중심축을 단단히 지탱해 낸 정학(김정현)이 남긴 여운이 유독 길게 복기 되는 까닭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정학 역에 김정현을 비롯해 엄기준, 류수영, 최진혁, 유준상, 무영 역에는 윤시윤과 박규원, 산들, 유선호, 오종혁, 그녀 역에 이지수·박새힘이 최종 라인업을 구축했다. 서울 공연은 디큐브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오는 8월 23일까지 이어지며 대전, 대구 등에서 투어 공연도 진행한다.


장은지 기자 eun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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