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경력직 선호, 청년은 경력 쌓고 싶지만 중소기업 선택은 주저
전문가 "좋은 중소기업 늘리고 대·중소기업 '경력 사다리' 복원해야"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이상서 기자 = 기업들이 직무 경험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는 채용 기조가 확산하면서 청년들은 '경력'이라는 또 하나의 취업 문턱과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정작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중소기업은 청년들의 첫 직장 선택지에서 밀려나 있다.
결국 기업 일자리 5개 가운데 4개가 중소기업에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청년 고용 문제를 풀기 위해선 중소기업을 첫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는 일자리로 바꾸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 경력은 필요하지만…중소기업은 첫 직장으로 '망설임'
20일 연합뉴스가 청년 11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업 관련 문항에 응답한 59명 가운데 '가장 많이 지원하거나 목표로 하는 기업'으로 대기업을 꼽은 응답자는 33명(55.9%)으로 절반을 넘었다.
공기업은 8명(13.6%), 중견기업은 7명(11.9%)이었으며 중소기업은 3명(5.1%)에 그쳤다.
'취업을 위해 당장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계약직이라도 먼저 입사해 경력을 쌓겠다'는 응답이 15명(25.4%)으로 가장 많았다.
여기에 '중소기업에서 먼저 경력을 만들겠다'는 응답(9명·15.3%)을 더하면 우선 경력을 쌓은 뒤 다음 기회를 모색하겠다는 응답이 40%를 넘는 셈이었다.
청년들이 이같이 경력을 만들려는 이유는 기업들의 채용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상반기 민간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 경력직만 채용하는 공고는 전체의 82%에 달했고, 신입만 채용하는 공고는 2.6%에 그쳤다.
지난해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서도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가운데 28.1%는 이미 경력을 보유한 이른바 '중고 신입'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청년들은 중소기업에서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나타내며 첫 직장으로는 중소기업을 선호하지 않았다.
다음 달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취업을 준비 중인 정모(24) 씨는 "청년들이 눈이 너무 높아서 일자리를 못 찾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처우 차이가 너무 크고 중소기업에 간다고 해서 취업 준비 과정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라며 "같은 노력을 들인다면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압박이 있거나 취업이 급하면 어디든 가자는 생각이 들겠지만 아직은 눈을 낮추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A(21)씨도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이유에 대해 "단순히 연봉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은 성과급과 다양한 복지 수준에서도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대기업들의 막대한 성과급 지급 소식에 대해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특허사무소 분야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다 최근 퇴사한 백모(34) 씨는 "중소기업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10∼11개월 계약을 반복하는 회사도 적지 않았다"며 "최소 3년은 일해야 커리어로 인정받는 만큼 오래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의 한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28세 직장인은 "취업시장이 어려워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뒤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해서 낮게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부터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 기피 현상의 배경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잇는 '경력 사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지목한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대기업에 비해 처우가 열악하더라도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뒤 대기업으로 원활하게 이직할 수 있다면 중소기업 취업도 충분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간 이직은 활발하지만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은 상대적으로 적어 중소기업 취업을 기피하는 인식이 형성됐다고 진단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더 나은 기업으로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인재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 장기적인 방안이라고 봤다.
단기적으로는 대기업이 협력 중소기업에 인재관리와 경력개발 노하우를 공유하고, 중소기업 인재들이 대기업에서 직무 역량을 쌓을 수 있는 상생 교류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청년 잡은 중소기업들의 공통점은 '성장과 보상'
청년 인재 확보에 성공한 중견·중소기업들은 성장 기회와 공정한 평가·보상 체계를 마련해 청년들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고용노동부가 선정한 '2026년 청년일자리 강소기업'인 AP위성은 청년 인재 확보의 비결로 직원들이 기술과 역량을 발휘하며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 점을 꼽았다.
이 회사 임직원 190명 가운데 2030 세대 비중은 45%에 달하며, 연구개발과 생산, 품질, 사업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AP위성 관계자는 "청년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회사의 사업 성과와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며 "평가 결과뿐 아니라 평가 기준과 과정이 얼마나 명확하고 일관적인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개발비 지원과 사내 멘토링, 장기근속 포상 등을 통해 직원들이 전문성을 쌓으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청년일자리 강소기업인 아시아비엔씨도 성장 가능성과 공정한 조직문화를 청년 인재 확보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아시아비엔씨 관계자는 "회사의 성장 가능성과 직원들의 커리어 확장 경로를 명확하게 안내하고 있다"며 "2030 직원들은 공정한 평가와 투명한 소통, 자율적인 근무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세대나 직급과 관계없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기부가 선정한 예비유니콘 기업인 에이블리는 경쟁력 있는 보상을 위해 연 2회 정기 연봉 조정과 비포괄 임금제를 운영하고 있다.
에이블리 관계자는 "2030 세대는 자신의 노고와 결과를 공정하게 인정받고 그에 따른 확실한 보상이 주어질 때 누구보다 몰입해 성과를 내는 세대"라며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는 공평한 보상보다 기여한 만큼 돌려받는 공정한 보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종과 규모는 다르지만 이들 기업은 성장 기회 제공과 공정한 평가·보상, 자율적인 조직문화 조성에 공통적으로 힘을 쏟고 있었다.
◇ "좋은 중소기업 늘려야 청년고용도 풀린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례가 일부 우수기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배규식 지역혁신연구원 대표는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낮은 연봉과 복지뿐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며 "대부분의 청년은 결국 중소기업에 취업하게 되는 만큼 청년 정책을 논할 때는 중소기업 정책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년 고용 문제를 논하면서 중소기업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소기업기본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기업 종사자 가운데 중소기업 종사자 비중은 80.4%에 달했다. 기업 일자리 5개 가운데 4개가 중소기업에 있는 셈이다.
결국 중소기업의 보상체계가 청년 구직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질 필요가 있지만 현실은 아직 거리가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중기연)의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기업의 월평균 특별급여는 대기업의 17.4% 수준에 그쳤다.
특별급여는 1년간 지급된 고정상여금과 변동상여금(성과급 포함)을 합한 급여를 말한다. 본봉인 정액 급여뿐 아니라 성과급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 기피 현상의 배경으로 "최근 들어 성과급 문제를 꼽을 수 있다"며 "중소기업에서도 성과급을 확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체계적인 멘토링과 성장 경험을 제공하는 기업일수록 청년 채용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며 "대기업도 협력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과 복지 수준 향상을 위한 지원을 강화하고 성과급의 일정 부분을 협력 중소기업 근로자와 공유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소기업 근로자에 대한 성과보상 체계를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지원을 강화해야 우수한 인력이 중소기업으로 유입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pseudoj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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