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개봉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벤져스 전쟁에서 세상을 떠난 토니 스타크가 남긴 마지막 유산, 선글라스 하나가 피터 파커에게 전달된다. 이름은 '이디스(E.D.I.T.H.)', "죽어도 나는 히어로(Even Dead, I’m The Hero)"라는 문장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안경을 쓰자 주변 인물과 디지털 기기에 관한 정보가 시야 위에 펼쳐진다. 음성 명령만으로 메시지와 사진을 확인하거나 각종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다. 안경 하나로 보고, 검색하고 심지어 통신기기까지 해킹하는 장면은 당시 관객들에게 그저 히어로 영화 속 신기한 상상으로 다가왔다.
상상은 현실이 됐다. 히어로가 아니어도 스마트 안경 하나면 눈앞의 정보를 확인하고 음성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다만 이번엔 토니 스타크의 신뢰도 자격 심사도 없다. 안경이 아무나의 손에 쥐어진 순간 그 활용처는 편의도 혁신도 아닌 '시험장'으로 먼저 향했다.
시험장에서 먼저 걸린 AI 안경
빛 반사 하나가 유일한 단서였다
최근 광주지검은 지난달 국가기술자격법 위반 혐의로 40대 남성 A씨를 약식기소했다. 국내에서 AI 안경을 이용한 부정행위가 사법 조치로 이어진 첫 사례다. A씨는 지난 5월 광주의 한 소방설비기사 자격증 시험장에서 AI 안경을 착용한 채 시험을 보다가 감독관에게 적발됐다. 시험 도중 안경알에 비친 빛을 수상하게 여긴 감독관의 눈에 덜미가 잡힌 것이다.
비슷한 시기 서울과 목포의 국가기술자격시험장에서도 20대 남성 2명이 같은 수법으로 적발돼 입건됐다. 토익에서도 5월 2명, 6월 1명이 AI 안경을 착용한 채 시험을 치르다 잇달아 드러났다.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주요 국가자격시험 시행기관들은 지난 10일 긴급회의를 열고 AI 안경을 시험장 반입 금지 물품에 명시하는 방안과 적발 시 처분 기준 강화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전 카메라폰이 처음 확산됐을 때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됐다. 불법 촬영 논란이 커지자 정부와 제조업계는 2004년 촬영 시 약 60~68데시벨의 소리가 나고 진동이나 무음 모드에서도 이를 끌 수 없도록 하는 단체표준을 마련했다. 대응은 단순했지만 효과적이었다. 사진은 몰래 찍을 수 있어도 촬영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적어도 몰래카메라에서 '몰래'를 걷어내는 경고 장치로는 충분했다.
AI 안경은 그 최소한의 경고마저 지운다. 착용한 상태 그대로 작동하고, 손을 들 필요도 카메라를 겨눌 필요도 없다. A씨를 적발한 단서가 '우연히 눈에 띈 빛'이었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빛이 감독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부정행위는 평범한 응시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시험 부정행위와 사생활 침해는 서로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하나는 공정성, 하나는 프라이버시의 문제다. 그러나 두 사안은 같은 허점 위에 놓여 있다. 우리 사회의 신뢰 체계는 '누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있다'는 전제로 설계돼 왔다. 시험 감독은 수험생의 동작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전제로 촬영 동의 관행은 카메라를 든 사람이 식별된다는 전제로 작동해 왔다.
낡은 신뢰 설계가 드러낸 구멍
가시성 자리에 선 '안경 파놉티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규율 권력을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로 설명한 바 있다. 감시자는 죄수를 항상 볼 수 있지만 죄수는 감시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비대칭적 구조다. AI 안경이 만드는 상황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착용자는 상대를 보고 기록하고 정보를 얻지만 상대는 그 시선의 존재조차 알아챌 방법이 없다. 감시탑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안경 하나가 들어선 셈이다. 기술이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냈다기보다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낡은 신뢰 설계의 구멍을 드러낸 것에 가깝다.
AI 안경은 분명 장점이 많은 도구다. 손을 쓰지 않고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실시간 번역과 검색, 길 안내도 받을 수 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더욱 혁신적인 소통 수단이 될 수 있다. 대화 상대의 말을 렌즈 위에 자막으로 띄워주고 기술이 더 발전하면 뮤지컬 같은 공연에서도 별도의 자막 기기 없이 눈앞에서 즐길 날이 다가올 것이다. 스마트폰의 뒤를 이을 차세대 인터페이스로 꼽히는 이유다.
언제나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악용하는 쪽이다.
반입 금지부터 LED 의무화까지
접근법은 달라도 목표는 하나
미국 사법부는 AI 안경을 녹음·녹화 장비로 보고 법원 반입 자체를 제한하는 추세다. 필라델피아 법원은 배심원과 증인 보호를 이유로 반입을 금지했고 법정 안에서는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뉴욕주도 주 전역 법원 시설에서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는 안경 반입을 막기로 했고 하와이·위스콘신 등에서도 같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기기 자체에 신호 의무를 지우는 방식을 택했다. 스마트 안경을 이용한 승무원 몰래카메라 영상 유포로 파문이 일자 중국정보통신연구원(CAICT)은 안경 외부에 LED나 신호음 장치를 탑재하고 이를 임의로 가리거나 무력화할 수 없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정보 처리도 외부 클라우드 대신 기기 내부에서 해결하는 '온디바이스 AI' 방식을 요구했고 촬영물에는 생성 출처 코드를 포함해 유포 경로를 추적할 수 있게 했다.
메타 역시 자사 AI 안경 전면에 촬영 중임을 알리는 흰색 LED 표시등을 달았다. 전원 스위치가 없어 임의로 끌 수 없고 표시등을 가리려는 시도가 감지되면 카메라 기능이 자동으로 꺼진다. 표시등 변조 서비스를 판매하는 행위에는 게시물 삭제와 계정 정지로 대응한다.
반입 자체를 막을 것인가 기기에 신호 의무를 부과할 것인가. 접근법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AI 안경이 만들어낸 시선의 비대칭을 줄이고 사라진 가시성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다.
국내에는 아직 AI 안경 사용에 대한 공통 가이드라인이 없다. 시험장, 병원, 공연장, 공공기관으로 기기가 확산되는 속도를 감안하면 혼선은 시간문제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는 AI 스마트 글래스를 사용자의 시선과 환경을 실시간으로 해석하는 '시선 중심 컴퓨팅'으로 정의하며 개인이 바라보는 대상 자체가 데이터가 되는 구조인 만큼 선제적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제삼자에게 촬영 사실을 알릴 고지 조치, 탈의실 등 민감 공간의 이용 제한 기준, 촬영 알림 LED 의무화 같은 하드웨어 보완이 함께 거론된다.
중요한 것은 AI 안경을 무조건 금지하는 일이 아니다. 편의와 접근성을 높이는 기술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 필요한 건 사용 자체를 틀어막는 규제가 아닌 촬영과 정보 수집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이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드는 규칙이다.
20여 년 전 카메라폰의 촬영음이 그랬듯 편익은 살리되 몰래 쓰일 가능성은 줄이는 장치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AI 안경이 스마트폰의 뒤를 이을 차세대 인터페이스라면 규칙도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기술은 이미 우리 곁에 들어와 있다. 남은 일은 안경이 지운 그 비대칭적 시선을 어떻게 다시 균형 있게 되돌릴 것인가다.
☞ AI 스마트 안경(AI Smart Glasses) = 카메라와 마이크, 디스플레이, AI 기능을 결합한 웨어러블 기기다. 착용자가 음성 명령이나 시선을 통해 실시간 번역, 검색, 사진·영상 촬영, 정보 표시 등을 이용할 수 있으며, 스마트폰을 대체할 차세대 인터페이스로 주목받고 있다.
☞ 시선 중심 컴퓨팅(Gaze-centric Computing) = AI 스마트 안경처럼 사용자가 바라보는 대상과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인식·분석해 정보를 제공하는 컴퓨팅 방식이다. 사용자의 시선과 행동 자체가 데이터가 되는 만큼 개인정보 보호와 촬영 고지 등 새로운 제도 마련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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