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골목·상점 연결해 마을 전체를 호텔로…주민 주도 재생 결실
"수익보다 마을이 살아나는 게 먼저…중요한 건 주민 간 신뢰 자본"
[※ 편집자 주 =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와 인구이동으로 전국에 빈집이 늘고 있습니다. 해마다 생겨나는 빈집은 미관을 해치고 안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우범 지대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농어촌 지역은 빈집 문제가 심각합니다. 재활용되지 못하는 빈집은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되지만, 일부에서는 도시와 마을 재생 차원에서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매주 한 차례 빈집을 주민 소득원이나 마을 사랑방, 문화 공간 등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를 조명하고 빈집 해결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정선=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18리 주민들이 폐광 이후 빈집과 폐가가 늘어가던 골목에서 8년 전 시작한 건 단순한 숙박업이 아닌 마을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주민들은 철거 대신 빈집을 고치고, 골목을 가꾸는 길을 택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이곳은 '마을호텔 18번가'라는 이름으로 전국 도시재생 현장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주민들이 함께 배우며 쌓은 건 신뢰였고, 되찾은 것은 공동체 정신이었다.
2018년 1월 고한18리 마을만들기위원회가 출범했을 당시 주민들은 마을을 그냥 '18리'라고 불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산간마을이었던 고한읍에는 탄광개발과 함께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마을이 늘어날 때마다 번호 붙이듯 생긴 순서대로 1리부터 36리까지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억센 억양을 가진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마치 욕설처럼 들렸지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지명도 없어서 고민하던 주민들은 '고한 18번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을의 변화가 기적 같다는 생각에 영화 '1번가의 기적'에서 이름을 따왔다.
좋아하는 노래를 '18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주민 스스로가 좋아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도 담았다.
그렇게 골짜기를 따라 시장과 주거지를 이어주는 기다란 골목길 '마을 18번가'가 탄생했다.
주민 스스로 주도하는 마을 재생 필요성을 절감한 주민들은 다양한 공모사업을 기반으로 빈집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재생 사업을 택했다.
한집 한집 시작한 빈집 정비와 유휴공간 활용, 골목길 정비가 결실을 보면서 마을풍경은 차츰 변화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갈 계획을 고민했다.
폐광 이후 여러 개발 사업을 겪으며 '대규모 시설을 유치한다고 해서 지역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고민 끝에 빈집과 상가, 주민과 골목을 하나의 자원으로 연결하는 마을호텔 사업을 선택했다.
밖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보다 마을이 가진 자원을 하나로 이어 시너지를 내는 해법을 찾은 것이다.
마을호텔의 시작은 1970년대 문을 연 초원식당이었다. 이곳은 탄광 전성기에는 근무조를 마친 광부들의 회식 장소로 북적였지만, 폐광 이후 골목이 쇠락하면서 2017년 문을 닫았다.
주민들은 마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초원식당을 마을호텔 18번가 1호점으로 낙점했다.
2020년 초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같은 해 5월 1호점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데 이어 2022년 6월에는 2호점을 열었다.
낡은 빈집은 객실이 되고, 골목은 로비가 되고, 식당과 공방은 부대시설이 됐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호텔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는 연평균 1천500여명이 투숙하고, 이보다 더 많은 1천800여명이 매년 성공 비결을 배우고자 이곳을 찾는다.
마을호텔이 문을 연 이후 누적 방문객 수는 7만여명에 이를 정도다.
김진용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 이사장은 "재생 전까지 이곳에 사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떠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외부에서 오시는 많은 분이 '호텔 매출이 얼마냐?', '방문객은 몇이냐?'고 물어보시는데, 저희는 마을호텔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쇠락하던 마을을 살리는 과정에서 우연히 호텔 사업을 하게 된 것"이라며 "수익보다 마을이 살아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다.
이제 이곳에는 옛 을씨년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파스텔 색조로 단장한 건물 사이사이로 계절 꽃들이 어우러지고, 근사하게 그려진 벽화들이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는 제비 가족들이 곳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쉴 새 없이 지저귄다.
관광라운지에서는 여전히 마을 발전을 위한 청년들의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투숙객들은 모닝투어·별 보기·도슨트워크·공방 체험 중 하나를 골라 추억을 쌓는다.
김 이사장은 마을호텔 18번가를 벤치마킹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뢰 자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많은 지역이 마을호텔이라는 형식만 보고 따라 하려다 실패한다"며 "우리도 처음 3년은 주민들끼리 다투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마을 재생에서 중요한 건 시설이나 예산이 아니라 주민들 간 신뢰"라며 "행정은 주민 대신 사업을 하는 주체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주민 스스로 삶터를 가꾸어나가는 마을'을 대전제로 마을 재생을 도운 신동훈 야생화마을 고한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장은 "행정과 전문가, 주민이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한 것이 마을호텔 18번가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성과는 외부에서도 인정받았다.
마을호텔 18번가 협동조합은 지난해 협동조합의 날을 맞아 기획재정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최근 농어촌 기본소득 현장 점검을 위해 고한읍을 찾았다가 마을호텔 18번가를 직접 둘러보고는 "농촌의 빈집과 노후주택 등을 정비해 마을을 재생하고 관광객 유입을 늘려 지역을 활성화한 좋은 사례"라고 칭찬했다.
이제 고한18리에는 한때 떠나고 싶어 했던 폐광촌의 모습은 더는 없다. 머물고 싶은 마을만 남아 있을 뿐이다.
conany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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