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혼자서 밥 먹기), 혼술(혼자서 술 먹기) 등의 개인주의 문화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즐기는 보드게임이 전성기를 맞이해 눈길을 끌고 있다. 해외 리서치 기관 Imarc에 따르면 국내 보드게임 시장 규모는 매년 두 자릿수 비율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또 도심의 주요 번화가에는 보드게임 카페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보드게임 박람회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개인주의 시대의 역설, 보드게임 열풍…"대면 상호작용과 아날로그 감각에 대한 욕구 불출"
르데스크가 직접 찾은 국내 최대의 보드게임 전시회 '2026 보드게임콘' 행사 현장은 평일 오전임에도 입구부터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많은 인파를 뚫고 행사장 내부에 진입했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보드게임을 구매하기 위해 캐리어, 대형 카트 등을 끌고 다니는 방문객들의 모습이었다. 일부 인기 게임 부스 앞에는 약 500m에 달하는 대기줄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최대 화제작으로 꼽힌 보드게임 '세티(SETI)'의 경우 오전 11시 기준 구매 대기 번호표가 이미 800번대를 넘어서 상태였다. 현장 관계자는 "지금 번호표를 받으면 결제까지 최소 4시간 이상 소요된다"고 설명할 만큼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방문객들의 구성도 다양했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행사장을 찾은 학부모부터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남녀, 연차를 쓰고 온 직장인 등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새벽부터 행사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직장인 김법기 씨(35·남)는 "이번에 새로 출시된 신작이 과거 품절됐던 인기 상품과 함께 발매된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 5시 반부터 기다렸다"며 "이번에 구매하게 되면 올해 여름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학부모 고명희 씨(42·여)는 "지인이 아이들 두뇌 발달과 집중력 향상에 좋다는 게임들을 추천해줘서 구매하러 왔다"며 "여름방학 놀이로 괜찮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보드게임의 뜨거운 열기는 도심 속 주요 상권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서울 지하철 강남역 인근의 한 유명 보드게임 카페는 평일 저녁과 주말이면 대기 없이는 입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해당 카페 사장은 "주말에는 항상 웨이팅이 걸릴 정도로 이용객이 많다"며 "20·30 세대가 주 고객층이고 주로 연인이나 여성 고객들이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이볼 등 가벼운 주류도 함께 서비스하고 있어 시끄러운 술자리에 부담을 느끼는 청년들이 건전하고 이색적인 모임 장소로 많이 찾는다"고 덧붙였다.
최근의 보드게임의 열풍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우선 보드게임 자체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 대표적인 이유로 꼽힌다. 과거에는 부루마블이나 젠가, 할리갈리 등과 같이 단순하고 직관적인 게임 중심이었단 최근에는 고차원적인 전략 게임이 다수 출시되고 있다. 보드게임의 난이도를 나타내는 지수인 '웨이트(Weight)'를 기준으로 했을 때, 과거의 게임이 1점대에 불과했다면 최근에 출시되는 게임들은 정교한 전략적 사고를 요하는 3~4점대 게임들이 판매량 순위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대학생 최민우 씨(23·남·가명)는 "예전부터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자주했는데 점점 복잡하고 전략적인 게임에 눈이 간다"며 "게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승리했을 때 성취감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SNS 숏폼 콘텐츠 등 인스턴트식 도파민 자극에 대한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디지털 디톡스' 목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26 보드게임콘' 행사장에서 만난 기현무 씨(28·남)는 "컴퓨터나 모바일 게임도 즐기지만 보드게임은 사람을 실제로 대면해 직접 소통하며 플레이하다 보니 몰입감 자체가 다르다"며 "하루 종일 자극적인 숏폼을 보며 뇌를 멍하게 놔두는 것보다 사람들과 만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이 훨씬 상쾌하고 자신감도 생긴다"고 말했다.
대면 상호작용과 관계 형성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도 보드게임이 각광을 받고 있다. 게임 내에서 주사위를 굴리거나 카드를 건네는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운 대화 유도 장치(아이스브레이킹)가 되는데다 공동의 목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대감과 친밀감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직장인 한지수 씨(28·여)는 "보드게임이라는 매개체가 생긴 덕분에 평소 연락이 뜸하거나 자주 보지 못했던 지인들과도 만나는 자리가 부쩍 늘어났다"며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확실히 뭐든 혼자서 하는 게 많다지다 보니 반대급부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걸 더 찾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보드게임 열풍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국제적 규모의 보드게임 행사인 '독일의 에센 보드게임 박람회(Spiel')는 매년 역대 최다 관람객 수를 갈아치우고 있다. 또 일본 Z세대 사이에서는 아날로그 소통이 필수인 보드게임을 합리적 소비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세계 보드게임 시장 규모는 올해 기준 약 170억 달러(약 23조 원) 규모로 평가되며 향후 2032년까지 연 평균 약 10%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드게임 열풍에 대해 모바일 중심의 비대면 플랫폼이 팽창할수록 인간이 느끼는 대면 상호작용과 아날로그 감각에 대한 욕구가 역설적으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보드게임 산업의 꾸준한 성장세는 단순히 게임이라는 콘텐츠의 흥미를 넘어 요즘 사람들의 소비 방식과 여가 문화가 변화한 결과다"며 "일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디지털 화면과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실물 아날로그 경험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의 욕구가 맞물린 현상이다"고 진단했다.
이어 "스마트폰 숏폼 콘텐츠 등이 제공하는 자극적 도파민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현대인들이 점차 뇌의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디지털 화면을 완전히 끄고 오프라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실체 있는 컴포넌트를 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보드게임은 이 디지털 과부하를 벗어나려는 일종의 아날로그 디톡스 경향을 그대로 투영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과거에는 물리적인 제품을 소유하는 방식의 소비가 중요했다면 현대 사회는 타인과 함께 나누는 경험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험 소비의 시대다"며 "보드게임은 여러 사람이 서로 눈을 맞추고 실시간으로 감정을 교류하고 공동의 시간을 공유하는 최적의 경험 소비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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