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만 가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처세술을 조기 이수한 우리는 영혼 없는 끄덕임과 '모르는 척'으로 무장한 생존의 고수들이다. 퇴근길 소주 한 잔에 "오늘도 버텼다"며 스스로를 마취하고, "받은 만큼만 일한다"며 핏대 세우는 걸 훈장처럼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다. 성공했다는 이들의 삶은 왜 우리와 이토록 딴판일까. 어쩌면 우린 그저 거대한 '펜듈럼(Pendulum)'의 진동판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춤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공력을 낭비하며 '잉여 포텐셜'을 공급하는 건전지 신세로 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교과서 대신, 왜 이 지겨운 장면이 무한 반복되는지 그 메커니즘이 궁금했다. 내게 그 프리즘을 빌려준 바딤 젤란드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의 '트랜서핑' 이론을 메스 삼아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김현우의 핫스팟]을 시작한다.
미국 뉴욕 맨해튼이나 워싱턴 D.C.의 유서 깊은 로펌 간판을 유심히 보면 꽤 재미있는 생리가 있다. '스미스, 존슨 앤드 윌리엄스'라는 번듯한 간판에서 어느 날 슬그머니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파인다. 전화를 걸면 안내원은 앵무새처럼 "아, 윌리엄스 변호사님은 여전히 훌륭한 수석 파트너로 함께 하십니다"라고 친절하게 답한다. 하지만 업계 바닥 사람들은 다 안다. 윌리엄스의 지분이 반토막 났거나, 조만간 짐을 싸서 나갈 거라는 사실을. 미국식 손절의 시작은 간판에서 글자 하나를 조용히 떼어내는 일이다.
2026년 현재, 미국 국방부가 이 짓을 했다. 공식 전투사령부 안내서에서 '미 인도태평양사령부'라는 거창한 간판을 내리고 '미 태평양사령부'라는 구형 간판을 다시 걸어버렸다. 2018년 제임스 매티스 장관이 인도양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이름을 바꾼 지 8년 만에 '인도' 두 글자가 증발했다.
오타일까. 펜타곤의 까탈스러운 엘리트 공무원들이 단체로 타이핑을 치다 졸았을 리는 없다. 국무부 외교 문서나 2026년 국가방위전략(NDS)에는 여전히 '인도태평양'이 살아있는데 말이다. 이 묘한 엇박자, 워싱턴 특유의 '간판 갈이' 정치학 뒤에는 미국의 복잡한 속내가 숨어 있다.
머리와 지갑이 따로 노는 미국, 두 현실선 사이의 딜레마
러시아 물리학자 바딤 젤란드가 주창한 '트랜서핑(Transurfing)' 모델을 빌려보자. 트랜서핑은 대중의 심리와 국가의 프레임, 에너지가 어디로 쏠리는지 읽어내는 독해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도' 글자 삭제는 미국 수뇌부의 머릿속에 투사되던 '슬라이드(현실의 그림)'가 교체되기 시작했다는 징후다.
현재 미국은 심각한 '의도 분열'을 겪고 있다. 두 개의 현실선을 놓고 저울질 중이다.
첫 번째 현실선은 '가성비 떨어지는 동네잔치'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중국이라는 불곰을 억제하겠다며 일본, 인도, 호주, 한국 등을 싹 다 불러 모아 '인도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스크럼을 짰다. 문제는 막상 회식비를 결제할 때가 되니 미국 혼자 독박을 쓰기엔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두 번째 현실선은 '보스들의 직거래장터'다. 이른바 G2 질서다. 골치 아프게 동네방네 동맹국들 비위 맞추며 끌고 갈 바엔, 미국 대통령과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담판을 짓는 편이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다. "대만은 살살 다루고, 관세는 이쯤에서 합의 보자"는 식이다.
미국의 정신(전략)은 여전히 중국 억지를 외치는데, 마음(정치)은 유지비용을 깎고 짭짤한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어 한다. 국방부는 최전선에서 줄을 긋고, 대통령은 담판을 탐내고, 국무부는 관성대로 쿼드(Quad)를 돌린다. 조직의 의도가 찢어지니 명칭과 문서, 행동이 서로 엇갈리는 '혼합 신호'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도' 삭제는 이 현실선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펜타곤의 무의식적 고백이다.
동맹국들의 착각, '인도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진자
인도태평양 전략은 그 자체로 거대하고 식탐이 강한 '진자(Pendulum)'였다. "자유롭고 개방된 질서"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실상은 '중국발 공포'를 먹고 자랐다.
일본, 인도, 호주는 신나서 이 진자에 올라탔다. 회의도 하고 공동성명도 내며 폼을 냈다. 하지만 진자는 시간이 지나면 애초의 목적보다 '자기 생존'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최근 쿼드 외교장관회의가 군사적 긴장감 넘치는 결의 대신, 해양 감시나 핵심광물, 재난 대응 같은 '스터디 모임' 안건에 집중하는 것을 보라.
군사적 견제가 약해진 것일까. 트랜서핑 관점에서는 오히려 영악한 '우회 전략'으로 읽힌다. "중국을 당장 봉쇄하자!"며 목표에 과도한 중요성(과잉 잠재력)을 부여하면, 중국의 맹렬한 반발이나 인도의 이탈 같은 거센 반작용이 터져 나온다. 쿼드가 부드러운 의제로 갈아타는 것은, 진자가 과열되어 펑 터지는 것을 막고 생명력을 연장하려는 눈물겨운 체급 관리다.
G2 직거래장터 개장? 짐 싸야 할 '사은품'은 누구인가
미국이 연합형 전략에 힘을 빼고 중국과 마주 앉는다고 해서 동맹국들이 진자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건 아니다. '미·중 두 강대국의 세계 관리'라는 더 무시무시하고 폭력적인 진자가 등장할 뿐이다.
G2 진자는 워싱턴 입장에선 달콤하다. 복잡한 동맹국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큰 틀에서 '쇼부'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동맹국 입장에선 재앙이다. 뼈 빠지게 미국 뒤에 줄 서 있던 일본, 호주, 인도는 졸지에 미·중 협상 테이블의 '사은품'이나 '협상용 지렛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다.
재미있는 건, 이 상황에서 "미국이 우리를 버리고 떠난다!"고 호들갑 떠는 행위 자체가 파국을 앞당긴다는 점이다. 트랜서핑의 '유도 전이' 법칙이다. 동맹국들이 불안에 떨며 미국 바짓가랑이를 붙잡거나 "미국 못 믿겠다"며 독자 노선으로 엇나가면, 미국은 이를 핑계 삼아 더 빨리 짐을 싼다. 우려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그 끔찍한 우려를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영수증은 펜타곤에 있다
옆집 식당 간판 떨어지는 걸 구경하는 한국은 안전할까. 미·중이 멱살 잡고 싸울 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걱정이었는데, 둘이 어깨동무하고 장사를 시작하면 주한미군, 반도체, 북핵 문제가 한데 묶여 '새우젓' 통째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판이다.
"미국 형님이 우릴 지켜줄까?", "중국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는데" 한미동맹의 뼈대는 굵게 유지하되 방위력은 독자적으로 키우고, 일본·호주·유럽과 그물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한국을 함부로 묶어서 팔아넘기지 못하게 '비싼 몸'이 되어야 한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두고 가성비를 따지며 엑셀을 밟을지 브레이크를 밟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펜타곤이 실제로 어디에 달러를 쏟아붓고, 어디에 항공모함과 탄약을 박아두는지, 챙겨봐야 한다. 말과 간판은 언제든 우아하게 포장할 수 있지만, 예산과 군대의 이동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실선이 갈라지는 교차로에서 누가 진짜 청구서를 쥐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때다.
여성경제신문 김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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