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나애의 녹색 미술관] 예술로 말하는 환경이야기: 무엇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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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나애의 녹색 미술관] 예술로 말하는 환경이야기: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문화매거진 2026-07-15 17:48:39 신고

▲ 윤두서, 윤두서 자화상(尹斗緖 自畵像), 조선 숙종 36년(1710)
▲ 윤두서, 윤두서 자화상(尹斗緖 自畵像), 조선 숙종 36년(1710)


[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아이가 태어나 처음 뒤집고 일어서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은 부모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그 가운데서도 사회라는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딘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첫 번째 그림은 유난히 특별하다. 서툰 색칠과 삐뚤빼뚤한 선뿐인데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작품처럼 느껴진다. 액자에 넣어 걸어둘까 따로 보관함을 만들어야 할까 고민할 만큼 소중하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그림과 만들기를 들고 온다. 냉장고 문, 벽, 서랍까지 어느새 아이의 작품으로 가득 찬다. 처음에는 하나도 버리지 못했지만 어느순간 어떻게 하면 아이몰래 버릴수있을지만 생각한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모든 결과물을 끝까지 간직할 수는 없는것이다.

잘 그린 것 하나를 남기는 것과 그린 것 전부를 남기는 것, 그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두 화가가 있었다. 공재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연담 김명국(金明國, 1600-?)이다. 윤두서는 조선시대 화가로서는 흔치 않은 사대부 출신이다. 그런 그가 남긴 그림은 많지 않다. 마음에 차지 않는 그림은 스스로 없애거나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하는 그의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놀랍다. 특히 우리나라 유일의 국보 자화상인 '윤두서 자화상(1710년)'은 터럭 한 올까지 살아있는 듯한 밀도로 그려져 보는 이를 압도한다.

김명국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올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그림을 그리는 속도와 양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술을 좋아해 취한 채로 붓을 휘둘렀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려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쏟아낸 그림은 방대하지만 그만큼 기복도 있다. 어떤 그림은 감탄이 나올 만큼 힘이 있으나 또 어떤 그림은 다소 성긴 티가 난다. 다작 속에서 좋은 것과 덜 좋은 것이 뒤섞여 전해진 것이다.

한 사람은 적게 남기고 완벽을 추구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많이 남기고 기복을 감수했다. 두 태도 모두 나름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을 텐데 이 대비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금 자연과 지구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겹쳐 보인다.

윤두서는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이는 결국 자신이 만든 것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윤두서는 부족한 결과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남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물건 하나를 만들 때 그것이 오래 쓰일 수 있는지, 다 쓴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고민하는 생산방식이 필요하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매주 새로운 옷을 쏟아내고 그중 상당수가 팔리지도 못한 채 소각되거나 매립되는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면 적게 만들고 다 책임지는 윤두서의 태도는 지속가능한 생산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많이 만드는 것이 능력처럼 보이는 시대에 그는 오히려 덜어내는 것이 실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김명국의 방식은 그저 무책임한 낭비였을까. 김명국의 다작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완성도가 고르지 않고 어떤 작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마치 대량생산이 늘 품질의 하락을 동반하는 것과 닮아 있다. 많이 만들려다 보면 정성이 흐트러지고 결과물의 편차가 커진다.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물건 중 상당수가 이렇게 ‘적당히’ 만들어져 금방 버려진다.

▲ 김명국, 달마도(達磨圖)
▲ 김명국, 달마도(達磨圖)


하지만 그가 그토록 많이, 그리고 자유롭게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달마도’ 같은 걸작은 애초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완벽을 기다리며 붓을 아꼈다면 나오지 않았을 그림이다. 다작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시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낸 것들 중 세월과 안목이 좋은 것을 걸러내면서 결국 걸작이 살아남았다. 많이 그렸기에 여러 계층, 여러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림이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다작이 가진 힘이다. 소수의 완벽한 것만 존재했다면 그림은 소수의 감상물로 남았겠지만 그의 작품은 예술을 더 많은 사람 곁으로 가져다주었다.

문제는 다작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에 자연스러운 걸러짐이 일어나는가이다. 김명국의 그림도 수백 년의 시간과 사람들의 안목을 거치며 좋은 것들이 저절로 가려졌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량생산은 이 걸러짐의 과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것 대부분이 걸러지기도 전에 소비되고 곧장 버려진다. 시간이 골라낼 틈도 없이 다음 생산이 쏟아진다.

결국 두 화가의 태도 중 어느 하나만 정답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두서처럼 적게 만들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 때 신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김명국처럼 많이 시도하는 태도는 다양성과 확산이 가진 힘을 알려준다. 다만 그 다작이 건강하게 이어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시간과 안목이 걸러낼 여유, 그리고 걸러지고 남은 것을 오래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엇을 만들든 그것이 이 지구 위에 남는다는 사실이 우리가 정말 기억해야 할 점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어떻게 남길지 또한 결국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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